공리주의는 거칠게 말해, 개인의 행복(well-being)의 총합을 극대화하는 행위만이 옳다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고전적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이 행위자 중립적인 가치이며 개개인의 쾌락은 좋은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쾌락의 총합을 극대화할 이유가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고전적 공리주의는 쾌락주의(hedonism)로도 고려된다. 쾌락주의는 협의의 쾌락주의와 선호 쾌락주의로 나뉜다. 벤담은 전자에 해당하며 이러한 입장은 쾌락과 고통의 합을 극대화 시키는 삶을 최고의 삶으로 본다. 그리고 밀은 후자에 해당하며 쾌락의 합을 극대화시키기보다 선호 여부에 따라 질적으로 높은 쾌락을 더 바람직한 것으로 고려한다. 밀의 경우 최대 행복(공리)의 원칙을 행위의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보는데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밀과 같은 쾌락주의적 공리주의자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의 한 종류로 고려된다. 결과주의에 따르면, 어떤 행동은 그것이 전체적으로 가장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에만 옳다. 다시 말해, 결과주의는 행동의 옳음을 오로지 그것의 결과의 측면에서만 정의하고 이런 측면에서 공리주의자는 최선의 결과를 행복으로 고려한다. 한편, 결과주의는 행동의 옳음을 평가하는 기준에 따라 행위결과주의와 규칙결과주의로 나뉜다. 행위결과주의는 어떤 행동이 적어도 선택 가능한 다른 행동의 결과만큼의 결과를 가져올 경우에만 옳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반면 규칙결과주의는 행동이 어떤 규칙에 의해 허용될 경우에만 옳다고 본다. 이상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도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로 구분될 수 있다. 행위 공리주의에 따르면 행위자는 항상 모든 선택 가능한 행위들을 비교,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끊임없는 계산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비효율적이다. 반면에 규칙공리주의는 행위자가 최대 행복을 가져다주는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행위 공리주의자들처럼 끊임없는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규칙공리주의는 행위공리주의의 대안이 될 수는 있지만 이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로, 규칙공리주의의 행위자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규칙을 따랐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이 경우 규칙공리주의자인 행위자가 진정한 의미의 공리주의자인지 대답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둘째로, 첫 번째 비판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떤 규칙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있다. 셋째로 규칙공리주의가 다른 도덕이론들과 어떤 차별성을 가질 수 있는지가 문제시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규칙공리주의자들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도덕 원칙을 제시하더라도 다른 비결과주의 도덕 이론에서 제시하는 원칙과 내용이 같다면 어떤 측면에서 규칙공리주의와 다른 이론이 구별되는지 의문시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로, 규칙공리주의에 따르면 어떤 규칙은 그것이 기대되는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보편적인 수준으로 준수되어야 한다. 하지만 ‘보편적 준수’의 조건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조건이 아니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고전적 공리주의 자체에 대한 심각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먼저 결과주의는 행위의 결과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행위자가 어떤 의도에 의해서 그러한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는 결과주의가 개인을 그의 도덕 감정과 분리시킨다는 것이며 행위자가 사람으로서 그의 본질적 부분과 무관하다고 하는 주장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다. 즉, 결과주의는 개개인이 지닌 그들의 ground project를 무시해 이들의 온전성(integrity)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다.
또한 공리주의는 공리의 극대화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분배와 관련해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분배(e.g. 노예제)를 초래할 수 있고 모든 개인들의 욕구를 하나의 욕구체계로 통합함으로써 개인의 개별성을 신중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1.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한 롤즈의 반박
롤즈는 서로 다른 개인들의 이익과 손실을 총합(interpersonal aggregation)하는 공리주의의 도덕적 추론 방식을 문제 삼는다. 먼저, 롤즈는 공리주의적 총합 방식은 우리의 숙고된 도덕 판단에 위배되는 결과를 포함한다고 비판한다. (1) 특히, 공리주의는 오직 공리의 극대화만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분배와 관련하여 극단적으로 불평등한 분배(노예제도 등)를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숙고된 도덕 판단은 이를 명백히 거부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롤즈는 (2) 공리주의적 총합 방식이 그 자체로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공리주의는 한 개인의 이익에 있어서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의 원칙을 사회 전체로 적용해야 할 것이다. 이는 모든 개인들의 욕구를 하나의 욕구 체계로 통합하는 것일 수 있고 만약 그렇다면 이는 모든 개인들을 단 한 명의 개인으로 합치는 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롤즈는 공리주의가 개인의 개별성을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물론 롤즈가 말하는 ‘사람들은 서로 개별적이다(seperated)’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설명되어야 한다. 가능한 두 가지 해석은 형이상학적 해석과 도덕적 해석인데, 전자를 따르자면 공리주의는 공리주의적 총합은 형이상학적 오류를 범한 것이며 후자에 따르자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될 것이다.
2. 고전적 공리주의에 대한 윌리엄스의 반박
버나드 윌리엄스(Bernard Williams)는 공리주의가 개인의 온전성(integrity)을 침해한다고 비판한다. 공리주의에 따르면 옳은 행위란 최선의 결과를 낳는 행위이며, 행위자는 최선의 결과를 낳는 행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결과’에 본질적인 가치를 두기 때문에 행위에서 결과에 이르는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래서 행위자가 어떤 결과를 직접적으로 야기하는 행위를 했을 때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허용하거나 막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행위자는 전체적으로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책임을 ‘소극적 책임’이라고 하자. 윌리엄스는 공리주의가 소극적 책임 개념을 지니기 때문에 책임이나 올바른 행위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개인의 온전성(integrity)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공리주의가 이러한 온전성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충족시키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중 어떤 것들은 개인의 ground project이다. 이는 단순히 단기적 혹은 장기적 계획이기 보다 개인이 전체 인생에 걸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떠한 존재가 될 것인지에 대한 계획으로 개인의 온전성의 근본이 되는 것을 말한다. 윌리엄스에게 온전성은 개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단순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소극적 책임에 따르면 개인은 전체적으로 더 나쁜 결과를 피할 수 있다면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ground project조차 포기해야 할 수 있다. 또한 윌리엄스에게 행위자 혹은 개인이라는 것은 도덕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공리주의는 개인을 그의 도덕 감정과 분리시키는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해, 이는 행위자를 그 행위자와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도덕 감정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스는 공리주의가 개인을 그들의 ground project로부터 소외시켜 개인의 온전성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스의 이러한 입장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온전성은 개개인이 지니는 ground project의 내용에 관련 없이 그 자체로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인가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개인의 ground project가 노예제도를 부활하는 것일 때, 그의 온전성이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물을 수 있다. 물론 이 경우 주관적 온전성과 객관적 온전성을 구별해 대답을 하는 방향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객관적 온전성이 염두에 두는 “도덕적” 고려사항들이 이미 그 자체로 공리주의적인 것이라면 공리주의는 온전성을 침해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윌리엄스의 온전성 반론은 오로지 ‘도덕적’이라는 말이 비공리주의적으로 이해되는 경우에만 성립할 수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논변은 논점선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 환원주의와 윌리엄스의 “One-Thought-Too-Many” Objection.
결과주의와 비결과주의의 차이는 행위자 중립적 이유(Agent-neutral reason)를 고려하는 가 아니면 행위자 상대적 이유(agent-relative reason)를 고려하는 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행위자 상대적인 이유에는 특수 책무(special obligation)의 이유가 존재하는데 결과주의는 행위자 중립적인 이유를 지니기 때문에 일반 책무(general obligation)를 통해 특수 책무를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우선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이를 고려해 보자.
철수의 아내와 낯선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 오직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철수가 아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도덕이론에 있어 편애성(partiality)의 문제를 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이 제시될 수 있다. (1) 철수가 아내를 구하는 것에 대해 어떤 정당화를 내놓을 수 있는가? (2) 철수가 아내를 구할 동기부여적 근거(motivational basis)는 무엇인가? 철수가 아내를 구하는 것은 일반적인 책무(general obligation)가 아니라 특별한 책무(special obligation)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별한 책무가 일반적인 책무를 압도(overriden)하게 되는 경우를 정당화할 근거에 대해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환원주의(reductionism)와 비환원주의(non-reductionism)의 두 가지 대답이 존재한다. 비환원주의는 일반적 책무와는 독립적으로 특수한 책무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반면 환원주의는 일반적 책무를 통해 특수한 책무를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에 비환원주의의 문제점은 특수한 책무가 지니는 정당화의 힘이 분명치 않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특수한 책무가 무제한적으로 정당화하는 힘을 지닐 수 있다면 언제든지 다른 일반적 책무를 압도하는 반직관적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특수한 책무가 도덕률에 민감하다는 대응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철수가 아내를 구하는 것은 그 행위가 다른 일반적 책무를 위반하지 않는 한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특수한 책무와 일반적 책무는 양립가능해야 하는데 철수가 낯선 사람이 아닌 자신의 아내를 구하는 이유가 “자신의 아내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일반적인 책무를 압도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환원주의의 전략에 대해서 윌리암스는 “One-Thought-Too-Many” Objection을 제시한다. 그는 환원주의가 특수한 책무의 동기부여적 근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암스는 특수한 책무가 일반적 책무를 통해서 설명되어야 한다면, 철수가 아내를 구해야 하는 이유는 “나는 아내를 구해야되, 왜냐하면 나는 다른 사람을 구해야 할 일반적 의무가 있다는 사실에 의해 동기부여 받기 때문이지!”와 같은 것이 될텐데 이는 그야말로 “one thought too many”라는 것이다. 윌리암스의 주장은 이런 식의 정당화가 옳지 않다기 보다 우리가 실제 이런 식으로 동기부여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환원주의는 우리가 특수한 책무가 어떤 방식으로 규범적 힘을 발휘하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레일턴의 세련된 결과주의는 환원주의를 따르는 것으로 보이며 또한 이에 대한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레일턴에 따르면 세련된 결과주의는 폭넓은 의미에서 최대의 선을 극대화하는 행위자의 기질을 평가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철수가 아내를 구하는 행위는 그의 기질에 따른 것이니 철수의 실제 심리를 통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고. 레일턴의 공리주의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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