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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율뤼확

도덕의 우선성 문제(overriden)와 중요성: 내재론과 외재론

by 로짘 2020. 2. 29.

규범윤리학의 핵심적인 물음 중의 하나는 어떤 행위는 왜 옳거나 그른가?’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할 필요가 있으며 도덕적 판단은 행위의 이유에 관한 판단이고 행위자에게 그 행위를 하도록 동기 부여한다. 도덕적 판단을 합리성(이성, Reason) 혹은 행위의 규범적 이유에 대한 판단이라고 여길 때, 내재주의와 외재주의의 문제는 도덕적 판단이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고려할 수 있다. 또한 욕구를 도덕적 판단 외적요소로 고려할 때, 동기유발에 관한 도덕적 판단과 욕구의 우선성 문제 역시 야기한다.

 

내재론과 외재론의 문제는 도덕적 판단 외적 요소가 무엇이냐에 따라 다소 다른 입장이 가능하다. 욕구를 도덕적 판단의 요소로 보지 않을 경우, 욕구가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한다면 이는 도덕적 판단 외적 요소가 도덕적 행위를 동기 유발한 것이므로 이는 외재론에 해당한다. 그리고 내재론은 도덕적 판단 외적인 요소가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이는 욕구가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욕구를 도덕적 판단의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칸트의 입장은 도덕적 판단이 필연적으로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동기유발함으로 도덕적 동기에 관한 내재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토마스 스캔론은 어떤 행위의 이유가 욕구가 될 수는 없으며 도덕적 동기는 우리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려는 욕구에 기초해 있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도덕적 동기가 도덕적 판단인 이유에 대한 판단 외적 요소인 욕구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이 필연적으로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렇기에 외재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중간적인 입장도 존재한다. 버나드 윌리엄스는 욕구가 행위의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고 여기며 동기유발력 역시 지닌다고 여긴다. 윌리엄스의 입장은 욕구가 행위의 동기유발력을 지닌다는 입장에서 외재론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나 욕구를 행위의 이유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욕구는 도덕적 판단의 요소가 되고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 내적 요소가 행위의 동기유발력을 지니는 것이므로 내재론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제 윌리엄스의 입장을 중간적 입장으로 내재론의 칸트와 외재론의 스캔론의 입장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내재주의 입장인 칸트를 살펴보자. 칸트는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행위의 동기를 유발하는 사실이 같은 종류라고 고려한다. 그렇기에 도덕적 판단 자체가 도덕적 행위를 행하도록 필연적으로 동기유발한다. 그는 윤리학을 선의지에 관한 탐구로 이해했고 오직 의지의 자율에 의해 행해진 행위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게 선의지는 어떤 목표의 추구 및 달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한 것이 아닌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선의지는 도덕적인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실천이성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편적 행위의 준칙을 따른 의무의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것(act from the motive of duty)이었다. 그는 어떤 행위가 진정한 도덕적 가치(genuine moral worth)를 지닌다는 것은 곧 그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가능하다(universalizable)는 것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가능하지 않다면 그 준칙에 따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동정심에 의해 다른 사람을 도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의 다른 사람을 도운 준칙행위자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다는 준칙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욕구를 지닌 행위를 할 수도 있으며 이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를 따르라는 준칙은 보편화 가능하지 않고 그렇기에 욕구를 따르라는 준칙을 따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이성(practical reason)에 따라 의지의 자율에 의해 제시된 준칙을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준칙은 자기 이익이나 자신의 성향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행해진 것이 아닌 오직 내적인 의무감으로부터 의욕되고 행해진 준칙이었기에 무조건적으로 선한선의지에 따른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칸트는 내적 의무감의 근거에 놓여있는 실천 법칙을 명법’(Imperativ)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정언명법과 가언 명법으로 구별했다. 정언 명법은 행위의 수행이 곧 목표 자체임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그 자체로서의 선을 표현하는 것이며 가언 명법은 어떤 다른 목표를 추구하여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을 명령하는 명법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정언 명법에 속하는 실천 원리를 도덕성의 명법이라고 고려한다. 그래서 정언 명법에 속하는 도덕성의 명법은 정의상 어떤 목표나 의도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된다. 정언명법은 우리의 의지의 자율에 의해 제시된 도덕 법칙이기에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포함한다. 또한 이는 명법이기에 우리가 그에 따르는 도덕적 행위를 하도록 동기부여한다. , 그의 실천이성은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자 우리가 욕구와 같은 도덕적 판단 외적인 요소가 없이도 도덕적인 행위를 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는 내재주의자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외재주의자인 스캔론을 살펴보자. 스캔론의 입장은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동기유발력이 서로 다르며 욕구가 행위의 동기 유발력을 지닌다는 점에서 도덕적 판단이 행위의 동기를 유발할 수는 있지만 필연적으로 동기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으로 고려할 수 있다. 그는 도덕적 동기가 우리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려는 관심에 기초해 있다고 여긴다. 즉 도덕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기 위한 기준이며 도덕의 동기는 이러한 기준에 따르는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려는 욕구에 기초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는 지향적 주목이라는 의미의 욕구’(desire in the directed-attention sense) 개념을 도입해 행위의 이유와 욕구가 구별됨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행위의 이유와 욕구가 구별되기 때문에 행위의 이유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그 행위를 필연적으로 동기유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먼저 그의 지향적 주목이라는 의미의 욕구는 어떤 행동을 하는 이유를 지향하고 주목하는 욕구로 단순한 충동과는 구별된다. 스캔런은 이러한 욕구가 행동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여기는데 이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내가 새 컴퓨터를 사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하자. 인터넷 광고에서 컴퓨터를 광고할 때마다 나는 그 광고를 열심히 들여다본다. 스캔런은 이것이 그가 말한 지형적 주목이라는 의미의 욕구에 해당하지만 컴퓨터를 사는 행동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컴퓨터를 사야한다고 숙고한 뒤 컴퓨터를 사야하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면 그러한 욕구를 가짐에도 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컴퓨터를 사고 싶은 욕구의 지속이 그것을 살 이유를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설명한다.

 

둘째로, 일상적으로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내가 초콜릿을 먹는 이유가 된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현재의 욕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이유가 된다는 경우다. 이 경우, 욕구가 내 행동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스캔런은 내가 지금 초콜릿을 먹는 이유는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얻을 미래의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현재 내가 초콜릿을 먹고 싶은 욕구와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얻을 미래의 즐거움은 다르다. 그래서 현재의 초콜릿에 대한 나의 욕구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스캔런은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초콜릿을 먹는 이유가 된다고 여기게 되는 또 다른 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는 초콜릿을 먹고 싶다는 욕구와 초콜릿을 먹는 즐거움을 구별하지 않고 이를 욕구로 단순하게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캔런은 욕구가 어떤 행동의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스캔런의 입장에 따르면 행위자가 어떤 행위에 대한 이유를 지닌다는 것이 그 행위에 대한 욕구를 항상 동반하는 것은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는 도덕적 동기가 자신의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정당화하려는 욕구에 기초해 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행위자가 그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다는 이유를 가진다고해서 도덕적 동기를 필연적으로 가지는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캔런은 도덕적 판단에 대해 외재주의의 입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외재주의와 내재주의의 중간적 입장인 윌리엄스를 살펴보자. 그는 칸트와는 달리 욕구가 행위의 동기를 유발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으며 욕구가 행위의 이유가 된다고 여겼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을 통해 행위의 이유를 지님은 그 행위를 하려는 욕구도 지닌다는 흄주의적 입장을 지녔다.

 

참고. 윌리엄스는 다음과 같은 흄주의 논제를 받아들인다.

Humean Thesis: 만약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이유가 존재한다면 그는 그의 행위를 통해 지니게 될 욕구를 지녀야 하며 이 욕구는 그의 행위의 이유의 근원(the source of his reason)이다.

윌리엄스는 행위의 실천적 이유가 그 행위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또한 행위자가 그 행위의 이유에 대해 무지한 경우를 배제하기 위해행위자가 행위의 이유에 대한 오류나 무지가 없을 때그가 행할 수 있었던 행위에 대한 설명의 이유를 제공한다고 고려한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행위자의 실천적 이유는 행위자가 건전한 숙고의 상황에서 도덕적 판단이 자신의 행위의 동기가 됨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행위자의 욕구를 통해 도덕적 판단이 어떻게 그 행위의 동기가 되는지에 대한 설명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욕구를 그가 말하는 주관적 동기집합(subjective motivational set)에 포함시키고 이것에 독립적인 동기부여에 관한 설명은 실천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윌리암스 본인의 예시는 이렇다. 오웬 윈그레이브(Owen Wingrave)라는 사람은 군복무가 가문의 전통이라는 사실이 그가 입대를 할 이유라고 믿었다. 이 믿음은 정말로 그가 입대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그의 행동을 설명한다. 하지만 그 믿음 자체를 야기할 욕구나 기질을 그가 가지지 않았다면 군입대가 가문의 전통이라는 사실은 그의 입대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으며 그 믿음이 그의 군입대에 대한 이유라는 그의 믿음은 거짓이 된다. 이렇게 윌리엄스는 행위의 이유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건전한 숙고에 의해 이루어졌을 때, 그 행위를 하려는 욕구가 행위의 동기부여를 한다고 주장한다. 윌리엄스의 입장은 욕구가 동기부여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외재주의로 보일 수 있으나 욕구를 행위의 이유로 보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의 요소로 고려될 수 있고 이러한 측면에서 내재주의로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그의 실천적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실천적 이유(practical reason): 어떤 판단(consideration) R이 행위자의 행동 A에 대한 이유인 것은 오직 그가 건전한 숙고(sound deliberation)를 통해서 R A를 하는 이유로 인식할 수 있을 때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이유는 다음과 같이 외재적 이유와 내재적 이유로 구별될 수 있다.

i) 만약 R이 행위자의 실제적인 주관적 동기의 집합(subjective motivational set)에 독립적으로 행위자가 행위 A에 동기부여 되었는지를 설명할 경우, R은 외재적 이유가 된다.

ii) 만약 R이 행위자의 실제적인 주관적 동기의 집합을 통해서 행위자가 A를 하도록 동기부여 되었는지를 설명할 경우, R은 내재적 이유가 된다.


도덕적 우선성의 문제를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동기에 관한 내재주의와 외재주의의 문제로 이해할 때
, 이 문제는 규범윤리학의 핵심 문제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족스러운 도덕 이론은 옳음과 그름에 대한 이유제공력이나 동기유발력에 대한 설명을 제공해야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특히 욕구가 행위의 이유가 되는가에 대한 문제는 흄과 칸트의 입장 차이를 야기했던 것과 같이 역사적으로도 매우 주요한 문제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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