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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율뤼확

도덕적 자연주의와 직관주의에 대해 (무어의 열린 물음 논증)

by 로짘 2020. 2. 29.

자연주의 윤리설과 무어의 열린 물음 논증.

자연주의(naturalism)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사실(facts)은 자연과학의 동의를 얻은 혹은 최소한 양립가능한 것이어야 함을 주장한다. 자연주의 윤리학 혹은 도덕적 자연주의는 경험과학에서 사실을 판단하는 방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도덕적 판단의 옳고 그름을 설명하려고 한다. 자연주의 윤리론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자연주의 윤리설은 도덕적 용어가 자연적 속성을 지닌 용어를 통해 정의됨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good)쾌락’(pleasant)이나 우리가 가지기를 욕구하는 바를 만족시키는’(satisfies a desire we desire to have)와 같은 용어로 정의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은 도덕과 무관한 사실 진술과 의미상 동치가 되며 도덕적 진술의 의미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용어로 설명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자연주의 윤리설은 도덕적 용어는 자연적 용어를 통해 정의됨으로써 일종의 분석명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렇게 정의된 도덕적 용어는 총각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동치이며 분석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셋째로, 자연주의 윤리설은 도덕적 판단이 사실에 관한 경험과학적 진술과 마찬가지로 경험적 방식에 의해 검증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자연주의는 경험론이며 도덕적 판단은 일종의 사실에 관한 판단과 동일하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벤담과 밀의 쾌락 공리주의가 이러한 입장 중의 하나라고도 볼 수 있다.

 

직관주의 윤리설을 지지하는 무어(G.E. Moore)열린 물음 논증’(open question argument)를 통해서 자여주의 윤리설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윤리학의 근본문제는 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자연주의 윤리설을 따라 을 정의할 경우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는 에 관한 어떤 정의가 주어지든 그것이 그 자체로 선해야 할 것인데 자연주의 윤리설의 이러한 정의를 제시하는데 실패할 것임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에 대한 정의를 쾌락으로 제시했을 때, ‘쾌락은 그 자체로 선한가?’를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가 아니오라고 대답하는 것은 의 의미에 모순적이지 않다. 이런 점에서 무어는 이러한 물음이 열린 물음이라고 설명한다. 반면에 총각결혼하지 않은 남자라고 정의했을 때,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이 대답은 총각의 의미에 모순이 될 것이고 그렇기에 닫힌 물음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그의 주장은 선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사이에는 총각결혼하지 않은 남자와 같은 분석적 필연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주의적 술어와 사이에 분석적 필연성을 가정하는 자연주의적 기획은 옳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한 무어는 도덕적 용어에 대한 자연주의적 정의는 무의미한 동어반복(tautology)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예를 들어, ‘쾌락을 가져오는으로 정의한다면 쾌락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나 선하다라는 문장은 쾌락을 가져오는 것은 무엇이나 쾌락을 가져오는 것이다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어의 비판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귀결을 지닌다. 첫째로, 선한 것에 관한 명제들은 모두 종합 명제이지 결코 분석 명제가 아니다. 선은 정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선에 관한 명제는 정의에 의거해서 그것이 참임이 입증될 수 없다. 둘째로, 자연주의적 정의는 성립할 수 없으므로 이를 통해 도덕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자연주의적 추론은 모두 연역적 오류(deductive fallacy)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점에서 직관에 의해서만 도덕적 속성에 대한 인식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직관주의 윤리설

직관주의 윤리설은 직관이라는 능력을 통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옳은 것과 그른 것 그리고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즉각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제를 지닌다.

 

첫째로, 직관주의 논제는 도덕적 진술의 참 혹은 거짓은 우리의 직관에 의해 판단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둘째로, 비자연주의 논제는 도덕적 용어가 자연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도덕적 용어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셋째로, 도덕적 실재론의 논제는 자연적 대상으로 환원할 수 없는 도덕적 속성(사실) 혹은 도덕적 참이 존재함을 주장한다. 넷째로, 인지주의 논제는 도덕적 진술은 참 혹은 거짓의 진리값을 지님을 주장한다.

 

이렇게 직관주의는 비자연주의, 도덕적 실재론 그리고 인지주의를 가정하기에 실재론 및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이 직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직결될 수 있다.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존 맥키(John Mackie)의 오류이론(Error Theory)를 고려할 수 있고 인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에이어(A.J. Ayer)의 정서주의에 따른 반론을 고려할 수 있다.

 

먼저 맥키는 우리가 옳음과 그름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인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도덕적 회의주의 혹은 반실재론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래서 그는 도덕적 실재론의 논제를 부정하기에 우리의 마음과 생각 및 관습에 독립적인 객관적인 도덕적 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의 오류이론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증을 지닌다. (맥키의 오류이론은 아래를 참고.)

 

상대성 논증(The argument from relativity)

기이성 논증(The argument from Queerness)

 

정서주의(emotivism)를 지지하는 에이어는 직관주의 논제와 인지주의 논제를 공격한다.(참고. 에이어의 비인지주의) 그에 따르면 어떤 도덕적 판단을 우리의 직관을 통해서 했다면 그러한 판단을 기술하는 진술은 진리값을 지닐 것이고 이는 지식이 되어야 한다. 지식은 정당화된 참인 믿음인데 문제는 이러한 도덕적 판단이 지식이 갖추어야 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도덕적 판단이 지식이라면 우리가 이를 안다고 하기 위해서는 진리값을 지녀야 하고 우리가 이를 믿어야 하며 이러한 판단은 정당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직관에 의한 인식은 공적인 판단이기 보다 나의 마음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적인 판단에 해당한다. 다시 말해, 직관에 의한 판단은 정당화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이어는 직관주의가 주관적 확실성만을 줄 뿐 공적인 의미에서의 정당화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래서 객관적인 판단을 지니는 지식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참고. 존 맥키와 에이어의 입장은 도덕적 회의주의로도 고려될 수 있습니다. 도덕적 회의주의는 여기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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