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토마스 네이글의 의무론(절대주의)과 Two-step argument.
공리주의와 의무론이 지니는 한 가지 차이점은 의무론적 제한(deontological constraint)이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해서는 안 되는 행위들의 집합을 규정한다. 의무론적 제한은 side-constraint로도 이해되곤 한다.(cf. Robert Nozick) 이는 행위를 할 때,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side-constraint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의무론적 제한을 side-constraint로 이해하는 방식은 의무론적 제한의 강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완화된 형태는 제한을 위반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허용가능하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물론 완화된 형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의무론적 제한의 한계선을 책정해야 할 텐데 이 한계선이 어디인가에 대한 공격을 받을 수 있다.
토마스 네이글은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살인이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고 여긴다는 측면에서 side-constraint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의무론은 절대주의로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여기서의 ‘무고한’은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이 없는’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의도’(deliberate) 개념을 도입해 ‘무고한 사람을 고의로(deliberately) 죽여서는 안 된다’는 정식을 제시한다.
네이글의 이러한 절대주의는 두 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side-constraint를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의 도덕적 순수성(moral purity)을 보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런데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한 와중에 자신의 도덕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이기적(self-indulgence)일 수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이에 네이글은 도덕적 준수성 혹은 도덕적 온전성(integrity)는 살인에 대한 절대주의적 금지의 근거가 아니며 도덕적 옳고 그름은 이미 독립적으로 그리고 선행적으로 규정되어 있다고 대응한다.
두 번째 문제점은, 무고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side-constraint가 전략적 폭격과 테러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테러는 무고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함으로써 전의를 상실하게 만든다. 반면에 전략적 폭격은 전쟁에 주요한 시설을 폭파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만 이 전략적 폭격에 있어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이 예견될 수 있다. 이 경우, 무고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죽여서는 안된다는 절대적 제약이 있다면 전략적 폭격과 테러는 모두 허용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이에 네이글은 두 가지 제한을 제시한다. (1) 먼저 폭력이 가해져도 되는 사람들의 집합에 대한 제한이다. 즉, 우리는 아무나 공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대방에 대한 유관한 사실만을 고려해 그 상대방이 공격해도 되는 대상인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2) 둘째로, 폭력을 가하는 방식에 대한 제한을 가한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적대적이며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공격을 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공격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 지나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상대방에 대한 유관한 사실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공격을 한 미국의 공격을 생각해 보자. 일본은 미국을 공격했기에 공격을 해도 되는 대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공격의 방법이 원자폭탄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일본에 의해 미국 사람들이 일본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한다거나 원자폭탄의 사용 이외의 방식으로는 일본에 적절한 공격을 가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는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인과 같은 아시아인들은 포기를 모르는 종족이기 때문에 저항 의지를 없애버릴 정도의 과도한 공격이 필요하다는 인종에 관한 편견에 근거해 폭격을 했다면 이는 정당한 공격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네이글은 적대성(hostility)과 공격성(aggression)은 올바른 공격 대상에 대해 올바른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지점에서 네이글의 Two-step-argument가 제시된다. 먼저 첫 번째 단계에서 그는 행위의 허용가능성을 따진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전쟁에 있어서 적군을 인간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것과 양립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적이기에 정당한 공격의 대상이지만 “공격”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적군이 총을 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네이글은 은연중에 행위자의 의도가 행위의 도덕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됨을 암시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수류탄의 투척이 적을 죽이기 위한 의도는 없었고 그들을 멈추려는 의도를 지녔기 때문에 올바른 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은 네이글이 의도와 허용가능성의 문제에 있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중결과의 원리가 공격의 방식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의도와 허용가능성의 관계를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는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략적 폭격은 적절한 공격 대상에 대해 적절한 공격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의 허용가능성이 보장되고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을 예측을 할 수는 있지만 의도한 것이 아니라 적이 공격을 멈추게 하기 위한 공격이었으므로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무차별 폭격의 경우는 이러한 상황이 적용될 수 없다.
2. 이중결과의 원리
이중결과의 원리(the principle of double effect)란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보편적 기준(혹은 사실)이 존재한다고 여기는 도덕적 절대주의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고안된 것으로 행위의 허용가능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잘 나타내어 주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보편적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기준에 따른 행위가 항상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라면 올바른 행위가 나쁜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문제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서는 올바른 행위를 할 수 없는 도덕적 갈등(혹은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이중결과의 원리는 한 행위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는 모든 도덕적 논쟁을 해결하기 위한 절차를 제공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중결과의 원리는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나쁜 행위를 의도적으로 하는 것은 그르지만, 어떤 선한 행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알면서도 그 행위를 하는 것은 때때로 허용될 수 있음을 설명한다. 이 원리는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 (1) 딜레마 상황: 어떤 행위는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를 도출한다.
- (2) 옳은 의도와 수단-목적 조건: 행위에 의한 나쁜 결과는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한 수단이나 목적으로 의도되어서는 안 된다.
- (3) 비래조건: 좋은 결과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나쁜 결과보다 상당히 좋은 결과여야 한다.
이제 이를 전술적 폭격과 테러 폭격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이중결과의 원리는 전술적 폭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곤 한다. 전술적 폭격을 하려는 의도는 군수 공장과 같은 군사적 목표물을 파괴하려는데 있다. 이 목표물을 파괴하는 과정에서 비전투원들이 죽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중결과의 원리는 전술적 폭격을 정당화하는데 이는 폭탄의 사용이 민간인의 살상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폭탄 테러는 민간인들의 살상이 의도된다. 또한 2차 세계대전을 끝내려는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민간인 살상을 의도한 폭격(가령 일본에 투하된 원자 폭탄) 등은 이중결과의 원리에 의해서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르면 의도는 행위의 허용가능성 여부에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중결과의 원리는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진다. 첫째로, ‘의도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행위의 결과와 의도된 행위 간의 관련성이 분명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전술적 폭격은 이중결과의 원리에 의해 허용가능한 행위이다. 반면 테러 폭격은 민간인을 살상한다는 옳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허용불가능한 행위이다. 하지만 폭격기의 조종사가 지니고 있는 의도를 구분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 조종사가 군사시설만을 폭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보자. 이 경우 조종사의 심적 상태는 군사시설을 폭격하려고 한다는 의도와 민간인의 죽음을 의도하지는 않으나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민간인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군사시설을 폭격하려는 행위자의 의도와 어떠한 관련성이 있는지가 분명치 않다. 만약 행위자의 의도와 민간인의 죽음이 관련이 없다면, 2001년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격했던 9/11 테러리스트의 행위 또한 정당화될 수 있다. 이들은 단지 기업의 탐욕을 상징하는 쌍둥이 빌딩을 파괴함으로써 타락한 기업 문화에 경종을 알리려고 했으나 무고한 사람들이 부수적으로 희생될 것임을 예상했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중결과의 원리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
이중결과의 원리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 문제는, 실제로 나쁜 결과가 있을 수 없는 경우이다. 혹은 좋지 않은 의도의 행위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주술을 신봉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불치병에 걸리도록 저주의 주문을 외우는 행위를 한다고 해보자. 이는 실제 아무런 나쁜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르면 옳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허용할 수 없는 행위가 된다. 또는 자신의 평판을 위해서 남을 돕는 사람의 행위는 옳지 않은 의도를 지니기 때문에 허용가능한 행위라고 볼 수 없지만 이는 반직관적으로 생각될 수 있다. 즉, 이중결과의 원리에 따르는 몇 몇 행위는 우리의 도덕적 직관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결과의 원리는 ‘의도’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 딜레마 상황 역시 해결하려는 대안은 행위의 의도가 아닌 행위의 ‘결과’에 대한 합당한 예측을 고려를 하는 것이다. 토마스 스캔런이 이러한 입장을 지지한다. 우리는 전술적 폭격이라는 행위를 통해 군사적 이득에 대한 합당한 예측을 할 수 있다. 즉, 군사 시설을 폭격함으로써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다. 또한 가능한 나쁜 결과에 대한 합당한 예측 역시 가능하다. 민간인 희생자가 있을 수 있지만, 그 수가 최소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에 대한 합당한 예측 혹은 고려는 조종사의 행위의 의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중결과의 원리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다. 쌍둥이 빌딩의 예에서도 타락한 기업 문화에 경종을 알리기 위해 쌍둥이 빌딩을 파괴한다는 발상은 합당한 발상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무고한 사람들의 죽음이 예측되는 그러한 행위 없이도 타락한 기업 문화에 경종을 알릴 방도는 많기 때문이다.
스캔런의 이러한 대안에 대해 결과주의적인 대응이 아니냐고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만 좋다면 된다는 식의 대응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차이가 있는데, 왜냐하면 허용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곧 ‘내가 x를 해도 되는가?’에 대한 도덕적 의사결정을 묻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주의는 기본적으로 행위자 중립적인 이유를 고려하는 반면 스캔런과 같은 의무론자들은 행위자 상대적인 이유를 고려한다. 허용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내가 x를 해도 되는가?’를 물음으로써 ‘나’는 나에게 열려있는 모든 정보를 토대로 합당한 추론을 해야 한다. 즉, 나에게 유관한 정보들을 취합하여 판단하기 때문에 결과만을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해야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즉, 행위자 상대적인 이유를 묻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 결과주의와는 차별성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도는 행위의 허용가능성에 대한 물음, 즉 ‘x를 해도 되는가?’라는 도덕적 의사결정에 대한 물음에서 고려되지 않는다. 하지만 의도는 ‘행위자’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내리는데 역할을 한다. 행위자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어떤 행동을 했다는 사실은 그 행위자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게끔 만든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 행위가 굳이 ‘허용불가능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대안에서 ‘허용가능성’은 행위의 의도를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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