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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필레보스>에서 나타난 플라톤의 거짓 쾌락과 참된 쾌락에 대하여.

by 로짘 2020. 2. 29.

플라톤은 <필레보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쾌락에 대해 논의한다. 그는 먼저 (1) 몸과 혼의 쾌락과 고통에 대해 논하고 (2) 세 가지 거짓된 쾌락에 대해 논하며 마지막으로 (3) 참된 (순수한) 쾌락에 대해 논한다.

 

먼저 몸과 혼의 쾌락과 고통에 대해 알아보자. <필레보스>에서 플라톤은 몸과 관련된 쾌락과 고통, 혼과 관련된 쾌락과 고통 그리고 이들이 혼합된 경우를 구별한다. 먼저 몸과 관련된 고통은 갈증이나 허기와 같이 신체의 채워지지 않은 상태이며 그는 이것이 신체의 조화 상태가 해체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해체 상태로부터 원래의 채워진 상태로 돌아가 신체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쾌락이라고 설명한다. 다음으로 혼과 관련된 쾌락과 고통은 우리 신체 상태의 쾌락과 고통을 예상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신체의 쾌락에 앞서 이를 예상하게 되는 즐겁고 고무된 상태가 혼의 쾌락이며 고통에 앞서 이를 예상하게 되는 두렵고 괴로운 상태가 혼의 고통이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혼과 몸의 쾌락과 고통이 혼합된 경우가 존재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신체가 고통을 느끼고 있지만 그 고통을 멈추고 싶어 몸의 쾌락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 경우 신체의 고통을 지니지만 혼의 쾌락을 지니는 경우하고 설명한다. 그 반대의 경우가 신체의 쾌락을 지니지만 혼의 고통을 지니는 경우이다.

 

(하지만 엄밀하게는 쾌락과 고통이 몸에 의하기보다 혼에 의해 생기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고려한다. 예를 들어 갈증은 마실 것의 채워짐에 대한 욕구(epithymia)인데 채워짐에 대한 생각이 미치는 이유는 몸에 의함이 아닌 혼의 기억에 의함이라는 것이다. , 욕구는 몸의 것이 아닌, 혼의 것이고 욕구의 충족 과정에 수반되는 쾌락과 고통도 몸의 것이 아닌 혼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쾌락과 고통은 엄밀히 말해 몸에 의하기보다 혼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플라톤은 세 종류의 거짓된 쾌락에 대해 설명한다. 첫째로, 거짓된 판단에 뒤따르는 거짓된 쾌락이다. 쾌락과 고통은 종종 참된 판단이나 거짓된 판단에 뛰따르는데 옳은 판단과 지식에 뒤따르는 즐거움이 참된 쾌락이라면 거짓과 무지에 뒤따른 쾌락이 거짓된 쾌락이다. 예를 들어, 로또 당첨 번호를 잘못알고 자신이 1등에 당첨되었다고 판단하여 즐거워할 경우 이는 거짓된 판단에 뒤따르는 거짓된 쾌락이다. 두 번째는 신체와 혼이 서로 대비되는 쾌락과 고통을 지닐 때, 쾌락과 고통이 서로 대비되어 지각됨으로써 그것들의 강도와 관련해 거짓된 쾌락이 생기는 경우이다. 마지막은 쾌락과 고통이 없을 때 (의식되지 않을 때) 고통이 없기에 쾌락이 있다고 여기는 경우이다. 다시 말해, 고통이 없기에 쾌락이 있다고 하는 것은 거짓된 판단을 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거짓 쾌락이 되는 것이다.

 

(플라톤의 거짓된 쾌락에 대해서, 이 세 가지 종류의 거짓된 쾌락이 사실상 같은 종류의 것이라는 평가가 제시될 수 있다. 주된 근거는 이들이 모두 거짓된 판단에 의한 쾌락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경우의 거짓 판단에 의한 거짓 쾌락은 쾌락에 대한 예상에 의해 생긴 것이며 두 번째 경우 역시 혼과 신체가 서로 다른 쾌락 혹은 고통을 지니기에 일어난 것이며 혼의 쾌락은 예상(기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니와 같은 철학자는 세 번째 경우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의 부재이며 이러한 종류의 거짓 쾌락은 동시점적인 것이지 예상되는 것은 아니며 플라톤 본인도 첫 번째 유형과 세 번째 유형을 구별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플라톤은 참된 쾌락에 대해 논한다. 모든 쾌락이 결핍의 채움 혹은 결여의 회복 과정일 때, 참된 쾌락이란 지각하지 못하는 결핍을 채울 때에만 경험할 수 있다. 그는 향기나 아름다운 도형 및 빛깔들에 관한 쾌락만이 순수한 쾌락으로 간주하고 배움의 쾌락 역시도 순수한 쾌락에 속하기에 참된 쾌락으로 고려한다. 왜냐하면 배움은 무지의 상태(곧 결핍)로 인해 고통을 느끼지 않은 채 무지함을 채우는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쾌락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은 아니었는데 이는 쾌락이 결핍의 채우는 과정이며 과정이란 항상 목적(end)보다 열등한 것이기에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보다는 생성의 목적에 도움이 될 때에만 좋음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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