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의 회의주의는 세계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함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회의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퓌론을 고려할 수 있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방법론으로부터 회의주의적 입장을 이끌어낸 아카데미아의 철학자들을 고려할 수 있다. 회의주의에 반대되는 입장으로 스토아 철학을 고려할 수 있는데 편의상 스토아철학을 간략하게 알아보고 퓌론의 회의주의와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를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 스토아철학
스토아학파는 세계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으며 이에 대한 회의주의에 맞설 수 있는 인식론을 제시했다. 그들은 먼저 플라톤이 대비했던 지식(episteme)과 의견(doxa)을 구분하고 이 사이에 파악(katalepsis, cognition)을 도입한다. 여기서의 파악은 ‘파악 인상’(kataleptike phatasia, cognitive representation)과 연관되어 설명된다. 여기서 파악이라는 것인 실제 있는 것을 움켜쥔다는 의미로 파악인상은 우리 감각을 통해 외부세계에 대한 실제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스토아학파에게 지식은 건전하고 확고하며 논증에 의해 변화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인식이며 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지니는 것이다. 의견은 근거가 약하며 거짓인 믿음(동의)이며 우둔한 사람이 지닌다. 지식과 의견의 사이에는 파악이 있는데 이는 인식적 현상에 대한 동의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모든 사람이 사물을 파악할 수 있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파악만이 안정되며 논증으로 인해 흔들릴 수도 없다고 주장했으며 그것이 지식의 표식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토아학파의 파악인상은 두 가지 전제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인상(representation)은 세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 준다. 그리고 지각하는 사람이 그러한 인상을 파악할 수 있고 그러한 인상이 정확함을 신뢰할 수 있다. 퓌론과 아카데이마의 회의주의는 주로 두 번째 지점에 대해 비판을 함으로써 우리가 세계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지닐 수 없음을 주장한다.
- 퓌론의 회의주의(퓌론주의)
퓌론은 그리스 회의주의의 창시자로도 고려된다. 세계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스토아학파와는 달리 퓌론은 객관적인 지식을 얻을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러한 기준이 없음이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여겼으며 이러한 판단 중지를 통해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윤리적 목표가 성취된다고 여겼다. (마음의 고요함을 얻는 수단을 찾는 점에서는 퓌론주의가 에피쿠로스나 스토아철학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퓌론은 우리가 세계에 관해 참인 것을 말할 수 있다는 전제를 부정함으로써 우리가 사물의 본성 혹은 세계에 관한 객관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부정한다. 그의 첫 번째 근거는 우리가 지각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실제 세계가 지닌 본질에 대한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감각적 지각은 지각하는 사람에게 “나타내는 것”만을 알려주는데 세계에 관한 객관적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나타내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으로의 추론이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있는 것”에 대한 근거가 “나타내는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임의의 주체 S와 P가 있다고 할 때, ‘x가 꿀이다’를 정당화하는데 ‘x가 S에게 꿀처럼 보인다’를 근거로 사용하려고 한다면, ‘x가 P에게 꿀처럼 보이지 않는다’라는 주장과 양립가능해지는 문제가 생긴다. 다시 말해, x가 누군가에게 꿀처럼 보이고 보이지 않고는 그것이 꿀임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퓌론은 우리가 어떤 것을 인식하는 방식이 지각하는 사람의 본성과 외부환경에 상대적이라는 전제에게 ‘x가 S에게 y로 나타난다’와 ‘x가 y이다’를 구별한다. 그리고 우리의 감각적 지각이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에 관해 어떠한 판단의 근거도 주지 않기 때문에 ‘x가 y이다’라는 진술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은 확실성을 요구하는데 우리의 감각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전제되는 실재에 대해 우리가 지닌 지각적 경험만으로는 그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
아카데미아의 회의주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방법론을 통해 회의주의를 주장한다. 이들의 입장은 (그가 회의주의를 적극 옹호했는지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아르케실라오스에 의해 제시되었고 카르네아데스에 의해 완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지식과 의견 사이에 파악을 도입한 것이 적절치 않음을 먼저 지적한다. 스토아 철학자는 파악을 통해 지혜로운 사람과 우둔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아르케실라오스는 모든 사람이 파악을 할 수 있으니 파악은 지혜로운 사람들이 지닌 지식이거나 우둔한 사람들이 지닌 의견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스토아 철학자는 사람은 지혜롭거나 우둔하다는 전제로부터 지식과 의견을 구분했기 때문에 인식의 중간 상태를 필요가 없게되므로 파악은 지식이거나 의견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경우 파악은 지식이거나 의견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입될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파악을 파악 인상에 동의하는 것으로 여겼는데 이 파악 인상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할 수 없음을 논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파악 인상은 두 가지 전제를 지닌다. 첫째로, 인상(representation)은 세계에 관한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 준다. 그리고 둘째로, 지각하는 사람이 그러한 인상을 파악할 수 있고 그러한 인상이 정확함을 신뢰할 수 있다. 아르케실라오스의 지적은 첫 번째 전제를 받아들이더라도 우리가 동의하는 걱은 세계에 관한 감각적 인상이 아니라 명제라는 것이다. 또한 거짓일 수 없는 참인 인상에 대한 파악이 존재한다고 여겨질 수 없음을 주장하며 두 번째 전제를 부정한다. 스토아 학파에게 파악 인상의 특성은 그것이 참이며 거짓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아르케실라오스는 이것을 부정한 것이다. (카르네아데스는 특히 두 번째 전제를 구체적으로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외견상 참인 인상이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나는 상황, 예를 들어, 쌍둥이나 똑같은 달걀을 서로 구분하는 문제 등을 제기해 아르케실라오스의 입장을 뒷받침한다.)
마지막으로 아르케실라오스는 스토아 철학자들에 따르면 지혜로운 사람은 파악할 수 없는 경우에만 판단을 중지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나 판단 중지를 해야 한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파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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