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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연민·두려움에 따른 카타르시스에 대해.

by 로짘 2020. 2. 27.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는 그림, 조각, 음악, 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플라톤을 거론했던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의 시 비판론과 비교를 통해 그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미메시스론(모방론)을 수용하여 예술은 전체적으로 보아 모두 모방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시를 미메시스의 산물이라고 여겼지만 이들의 미메시스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이상국가를 소개하는데 그의 국가는 말하자면 이데아계에 대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 그의 국가는 이상국가라는 이데아에 대한 미메시스라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의 말을 전달하는 중간적 존재인 다이몬으로서의 철학자가 지혜의 덕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지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플라톤은 시인의 미메시스는 이데아계의 모상인 현상계에 대한 모방이기에 열등한 것의 모방이고 특히 이성적 생활을 저해하는 연민·두려움의 감정을 최고조로 북돋우는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시인 추방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3인간 논증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현상계의 2원론을 비판한바 있다. 그에게 진리나 실체는 이데아처럼 현상계에 초월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현상계의 개별자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형상과 같은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현상계의 보편적 성질에 대한 파악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물과 사실들 역시 엄연히 실재하는 것들이며 보편성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시가 일어난 사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즉 개연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역사 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플라톤이 시가 이성을 저해하는 연민·두려움의 감정을 북돋는 죄를 범한다고 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이러한 감정을 통해 정화 혹은 배설하는 카타르시스론으로 이에 대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인의 미메시스는 테크네였는데 특히 극적인 미메시스를 가장 본질적인 미메시스라고 여겼다. 시인의 미메시스는 플롯을 통해 극적일 수 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은 거칠게 말해 예술 작품의 전체적 짜임새를 의미하며 극에서는 인물의 행동을 조직하여 만든 구조를 의미했다. 플롯을 통해 이야기는 행동의 통일성, 균형, 일관성, 개연성 및 보편성을 지니게 되며 특히 비극의 경우는 깨달음과 뒤바뀜의 요소를 지니게 됨으로써 추론적·논리적 설명이 가능한 지적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의 미메시스를 플롯을 구성하는 능력이라 바라본 측면에서 기술이라고 여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건들을 엮어짠 플롯 구조가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거칠게 말해, 연민은 부당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을 볼 때, 그런 일이 우리에게 생길 수도 있기에 느끼는 괴로움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으며 두려움은 우리가 좋게 보는 이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걱정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잘 되고 못됨을 자기와 관련시켜 바라볼 때 생기는 보편적인 정서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단순한 감정으로 여기지 않고 이야기의 구조 자체(플롯)와 연관시켰다. 그래서 비극에서의 연민과 두려움의 정서가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기보다 카타르시스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슬픈 이야기던지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킬 수 있지만 단순히 슬픈 이야기가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당대의 카타르시스는 일종의 의학적 용어로 약에 의해 인체 속의 불순물을 말끔히 씻어내는 일을 의미했다. 또한 여기서의 의미가 확대되어 신을 예배할 장소를 깨끗이 하는 일이나 정신을 깨끗이 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는 바람직한 국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음악 교육에 대한 논의로 끝을 맺으며 음악의 효과를 논하면서 그는 카타르시스를 거론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약을 통해 몸의 병을 치유하듯 광적으로 종교에 빠져 정신이 병들어 있는 것을 음악으로 치유할 수 있음을 언급하는데, 이때의 치유의 의미로 카타르시스가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종교에 빠져 감정이 병적으로 열광하는 상태를 치유하는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극이 그 자체로 그러한 무책임한 열광의 상태를 지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비극의 관객은 상당한 지적 수준을 지닌 자유 시민이었고 이러한 측면에서 비극에서 느끼는 연민과 두려움은 이성의 판단에 의해 조절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해불가능한 우연과 같은 것은 비극의 플롯 밖에서 일어난 것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하며 플롯 내에서는 우연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한 이야기의 에피소드 중에는 개연성·필연성이 없는 것은 물론 이들과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 역시 철저히 제외해야 비극은 처음·중간·끝의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구조화되었을 때, 그 전체가 모자람 없는 인지적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의 행동을 하나의 인지적 이해의 대상이 되도록 만드는 미메시스의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비극은 플롯을 지니며 목적을 지니는 인물들의 행동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각 인물들은 어떤 구체적 목적을 지향하여 행동하기에 행동의 통일성, 균형, 일관성, 개연성 및 보편성을 지닌다. 그래서 관객들은 비극을 보면서도 현실과 극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으며 플롯의 구조에 의해 제시된 연민과 두려움은 관객들의 마음속에 가득 찬 연민과 두려움을 광적으로 분출시켜주기 보다 이를 조절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느끼게 해 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지나친 연민·두려움·공포의 정서를 극 속에서 적절히 조절된 연민·두려움·공포의 정서를 느끼게 하여 마음의 쾌감을 얻게 해 주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 단순한 감정의 해소나 치유가 아니라 플롯의 한 구성 요소로써 카타르시스를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카타르시스를 비극에 대한 정의를 제시하는데 있어 한 요소로 고려한 것은 카타르시스가 비극의 구조적 요건 중의 하나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카타르시스는 단순한 결과적 효과가 아니라 플롯 구성에서 연민과 두려움과 더불어 구조적 발전의 필수적 요소가 되며 시적 미메시스의 한 구조적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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