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시’는 그림, 조각, 음악, 춤을 포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플라톤을 거론했던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의 시 비판론과 비교를 통해 그의 입장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주장한 미메시스론(모방론)을 수용하여 “예술은 전체적으로 보아 모두 모방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시를 미메시스의 산물이라고 여겼지만 이들의 미메시스에 대한 관점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메시스’의 의미 역시 단순히 ‘모방’이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모방’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나 미메시스가 산출하는 ‘유니콘’, ‘용’ 등은 그 모방의 대상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재현’(representation) 혹은 ‘반영’(reflection) 등으로 이해하는 것도 논의의 여지가 있으므로 ‘미메시스’를 그대로 쓰도록 할 것이다.
플라톤의 ‘미메시스’는 철학자의 미메시스와 시인의 미메시스로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시인의 미메시스가 단지 사실이나 실재에 기생하는 무가치한 것 혹은 유해한 것으로 고려했다. 이러한 미메시스의 산물은 만물의 겉모양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듯 흉내낼 뿐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실재인 이데아 자체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신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현상계는 이데아를 본유, 모방할 뿐이라고 여겼는데 이러한 이데아계에 대한 이성적 설명으로서의 미메시스는 철학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철학자의 미메시스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이상국가를 소개하는데 그의 『국가』는 말하자면 이데아계에 대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의 『국가』는 이상국가라는 이데아에 대한 미메시스라 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신의 말을 전달하는 중간적 존재인 다이몬으로서의 철학자가 지혜의 덕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이지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플라톤은 시인의 미메시스가 테크네(techne, 기술)가 아니라고 여겼다. 그에게 ‘기술’(techne)이란 실제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기능과 그 일에 대한 체계적 지식을 뜻했는데 시인의 미메시스는 기능을 지니는지도 의심스럽고 또한 지식을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배울 수도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시란 합리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정체불명의 신이 넣어준 영감이란 것의 힘으로 본인도 이해 못하는 소리를 지껄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플라톤은 시인의 미메시스는 이데아계의 모상인 현상계에 대한 모방이기에 열등한 것의 모방이고 특히 이성적 생활을 저해하는 연민·두려움의 감정을 최고조로 북돋우는 죄를 범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시인 추방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방법론의 측면에서 “제 3인간 논증”을 통해 플라톤의 이데아-현상계의 2원론을 비판한바 있다. 그에게 진리나 실체는 이데아처럼 현상계에 초월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현상계의 개별자들에 대한 경험을 통해 형상과 같은 실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현상계의 보편적 성질에 대한 파악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사물과 사실들 역시 엄연히 실재하는 것들이며 보편성을 내포한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시가 일어난 사실을 대상으로 하기보다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즉 개연적인 것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역사 보다 더 보편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플라톤이 시가 이성을 저해하는 연민·두려움의 감정을 북돋는 죄를 범한다고 봤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오히려 이러한 감정을 통해 정화하는 카타르시스론으로 이에 대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과 달리 시인의 미메시스를 테크네(techne, 기술)의 일종으로 여겼다. 그에게 ‘기술’은 지식을 지니며 배워서 익힐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재주나 성향이 포함될 수 있었다. 즉, 시의 ‘영혼’인 플롯을 구성하는 재주를 타고나는 경우와 남이 하는 것을 익힌 경우가 모두 존재한다고 여겼다. 그는 재능의 경우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인정했지만 악기 연주, 노래, 춤, 그림, 조각을 미메시스 기술의 산물로 보고 이에 대해서는 합리적 설명이 가능하며 실천에 실질적 도움이 되는 지식에 근거한다고 봤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메시스’는 시와 관련된 용어로 사용되지만 그가 이를 특정 용어로 정의하지는 않았기에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는 시나 희곡에서 서사 시인이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것 보다 극의 등장인물이 직접 말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미메시스라고 했는데 이 ‘극적 발언’이라는 미메시스를 높이 평가한데서 ‘극적’인 미메시스를 가장 본질적인 미메시스라고 여겼다. 즉, 행동하는 사람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시적 미메시스의 특질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극적이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은 거칠게 말해 ‘예술 작품의 전체적 짜임새’를 의미하며 극에서는 인물의 행동을 조직하여 만든 구조를 의미했다. 그는 이 플롯 때문에 비극이 극적이게 되고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미메시스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극을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구체적 목적을 지향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 그의 윤리학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플롯은 이러한 행동의 구조화를 적절하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플롯을 통해 이야기는 행동의 통일성, 균형, 일관성, 개연성 및 보편성을 지니게 되며 특히 비극의 경우는 깨달음과 뒤바뀜의 요소를 지니게 됨으로써 추론적·논리적 설명이 가능한 지적 이해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의 미메시스를 플롯을 구성하는 능력이라 바라본 측면에서 ‘기술’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인의 미메시스’는 각가 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할 수 있다. 플라톤에게 시인의 미메시스는 이데아에 대한 것도 아닌 이데아의 모상인 현상계의 대상에 대한 모방이었고 그렇기 하찮은 것이며 지식을 지니지 않은 것이라 테크네라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시인의 미메시스’는 비극의 경우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행동을 플롯을 통해 구조화하여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윤리학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었고 플롯을 통해 이야기는 보편성을 지닐 수 있었기 때문에 지식을 지니는 테크네의 일종으로 고려되었다. 플라톤에게 시는 이성을 저해하는 연민·두려움의 감정을 최고조로 북돋는 죄를 범하는 것이라 윤리적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것이 정화와 배설을 의미했으므로 깨달음 역시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시인의 미메시스에 대한 차이는 곧 시에 관한 그들의 입장 차이로도 연결될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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