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이 그 자체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게 말해, 그는 ‘행복’을 ‘우리의 삶 전체에 있어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그의 입장에 따르면 행복은 전 인생(complete life)을 통한 완전한 선(complete goodness, telios)으로 자족적인 것이기 때문에 결여된 것이 없는 포괄적(comprehensive)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외적 선(external good)인 행운과 같은 것도 행복의 요소에 포함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행운과 불운을 간접적으로 다루는 저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시학』의 주된 주제는 비극이며 이는 보통 보다 잘난 사람이 행복에서 불행에 이르는 일연의 행동에 대한 모방(미메시스)이라고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어떤 구체적 목적을 지향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한 것이라 그의 윤리학의 범주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미메시스는 플롯을 통해 극적일 수 있는데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은 거칠게 말해 ‘예술 작품의 전체적 짜임새’를 의미하며 극에서는 인물의 행동을 조직하여 만든 구조를 의미했다. 이렇게 시인의 미메시스 기술(테크네, techne)을 통해서 비극이 제시되고 사람들은 이를 통해 연민과 두려움의 정서를 느끼게 되는데 이러한 정서는 비극에서의 운수의 변화에 대한 뒤바뀜(peripeteia)과 깨달음(anagnorisis)이 일어날 때, 최고조가 되며 이때 카타르시스가 달성된다고 말한다. 하마르티아(hamartia)는 뒤바뀜과 깨달음이 일어남에 있어 불운의 불확실성과 이에 대한 예측가능성(혹은 이해 가능성)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하마르티아’가 죄악, 인간의 비극적 숙명, 성격적 결함, 결정적 실수, 오해 등의 여러 의미를 포괄하는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시학』에서는 비극적 요소로써의 ‘판단 착오’로 이해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특히 부처(Butcher, S.H.)와 같은 사람은 하마르티아를 ‘인간의 약점이나 도덕적 위약성’ 혹은 ‘악한 목적이 개입하지 않은 성격의 결함’과 같은 방향에서 이를 이해하려고 하며 이를 기초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의 주인공들을 설명하나 셰익스어 비극과 고대 헬라 비극간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를 단순한 결함의 방향에서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보다 나은 방향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서의 하마르티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극에서 시인의 미메시스의 대상이 어떤 존재이며 또한 미메시스의 기술인 플롯이 지니는 특징을 통해 이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주인공이 보통 보다는 뛰어나지만 도덕적으로나 지능적으로 완전한 사람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한 사람이 비참해 질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완전히 선한 사람이 불운에 취약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극의 주인공은 신분이나 지위 및 재력 등의 외부적 선이 주어져있는 행운아이자 상당한 수준의 용맹·관용·지능 등의 도덕적 성품을 지녀 정신적인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이 영웅적이며 오이디푸스나 아가멤논이 그러하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행운의 도움을 받은 이들로 비극은 행운과 불운의 두 극단 사이의 변화를 다룬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완벽한 덕을 성취한 사람의 죽음은 일반인에게 분개·슬픔·절망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비극의 주인공들은 완벽한 덕을 지니지 못한 채로 불운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 변화가 연민과 두려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운수의 변화에 대한 깨달음(anagnorisis)과 뒤바뀜(peripeteia)은 비극적 행동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플롯의 전개에 있어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다음은 시인의 미메시스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플롯의 특징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에서의 불운은 이해불가능한 건전한 판단력에 위배되는 요소(그래서 비이성적인 요소)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이해불가능한 우연과 같은 것은 플롯의 밖에서 일어난 것으로 다뤄야 한다고 말하며 플롯 내에서는 우연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한 이야기의 에피소드 중에는 개연성·필연성이 없는 것은 물론 이들과 서로 연결될 수 없는 것 역시 철저히 제외해야 비극은 처음·중간·끝의 완결된 구조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야기가 이렇게 구조화되었을 때, 그 전체가 모자람 없는 인지적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의 행동을 하나의 인지적 이해의 대상이 되도록 만드는 미메시스의 기술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비극에서의 불운은 이해불가능한 우연이 아니라 예상 밖의 일이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하며 그렇기에 뒤바뀜이 일어났을 때, 깨달음이 뒤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뒤바뀜과 깨달음이 동시에 일어날 때, 연민과 두려움을 최고조로 조성하며 카타르시스가 달성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운수의 불확실성을 플롯의 확실성 속에서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불확실성과 확실성을 연결시키는 것이 하마르티아라고 할 수 있다.
비극을 보는 관객의 연민과 두려움은 중심 인물의 하마르티아에 의해 전혀 예상 밖의 그러나 이해할 수 있는 운수의 변화로 뒤바뀜과 깨달음이 생김을 인지하면서 극대화된다. 뒤바뀜은 행동의 방향을 완전히 예상 못한 방향으로 바꾸어놓는 것이지만 원인과 과정과 결과의 일관성은 그대로 긴밀하게 유지된다. 비극의 인물은 상당히 좋은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선택한 행동의 본질을 알지 못하고 그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온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누구나 이러한 무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이 무지 때문에 하마르티아가 생기고 동시에 깨달음과 뒤바뀜이 생기는 비극이 성립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깨달음’을 ‘무지에서 지식으로의 극적 변화’라고 설명했고 ‘극적’이라는 말은 그러한 깨달음이 안타깝게도 너무 늦었다는 것이고 이로 말미암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마르티아’를 ‘비극적 무지’ 혹은 ‘비극적 결함’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시학』에서 하마르티아를 인간의 비극적이고 숙명적인 결함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숙명적인 결함을 보이는 것이 비극의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며 하마르티아는 플롯을 통해 연민과 두려움의 정서를 이끌어 카타르시스에 이르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지나친 연민·두려움·공포의 정서를 극 속에서 적절히 조절된 연민·두려움·공포의 정서를 느끼게 하여 마음의 쾌감을 얻게 해 주는 것이라는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마르티아를 저지를 뻔하다가 깨달음이 생겨 비극을 모면하는 극을 최고라고 하기도 했다. 즉, 주인공의 깨달음이 하마르티아 직전에 생겨 행복한 결말을 향한 뒤바뀜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비극적 하마르티아 만이 연민과 두려움의 정서를 통해 카타르시스로 이끈다고 보지도 않았다는 측면에서 하마르티아는 단순히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 무지’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비극의 플롯을 구성하는 하나의 구조적 요소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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