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7권이 지니는 주요한 물음은 실체(ousia, substance)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다루며 특히 플라톤적 보편(universal, 보편자)은 실체가 아니며 형상(eidos)이 곧 실체라는 입장을 제시한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적 보편을 형상과 구별했다는데서 이들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는 그의 이전 저작인 <범주론>에서 먼저 소개된다. <범주론>에서는 ‘그것이 무엇이냐?’(ti esti?, what it is)를 지속적으로 물어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범주에 도달하는 것을 실체(ousia)라고 설명한다. 그는 실체를 비롯하여 10가지 범주를 구별했는데 실체 이외의 나머지 범주들은 실체에 의존해서 존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창백하다.’(Socrates is pale.)는 문장이 참이라고 할 때, 소크라테스는 실체이며 ‘창백함’(being pale)은 질(quality)이 되고 ‘창백함’은 ‘소크라테스’에 의존해서 그것의 진위 여부가 설명될 수 있다. <범주론>에서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개체로서의 실체를 제 1실체라고 했고 나머지 종(형상, eidos)과 류(genos)에 해당하는 것은 제 2실체라고 구별을 했으나 <형이상학>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모호해 진다. 이러한 차이는 그의 실체론에 대한 변화가 생겼다기 보다는 <범주론>에서는 개체의 종과 류를 비교하는데 주안점이 있었으나 <형이상학>에서는 본질과 개체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실체론을 전개해 나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고려하고 있으므로 제 1실체와 2실체가 명확히 구별됨을 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체인가? <형이상학> 7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실체의 후보로 4가지를 제시하고 실체가 될 수 없는 것을 가려낸다. 4가지 실체의 후보들은 본질(to ti ein einai, essence), 보편자(to katholou, universal), 류(genos, class), 그리고 기체(hypokeimenon, underlying thing)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의 기준으로 분리성과 이것임(to tode ti)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본질’은 ‘형상’의 다른 말이었는데 그는 이들 중, 형상만이 두 기준을 만족하는 실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먼저 ‘소크라테스는 동물이다’와 같이 류(class)에 해당하는 동물임(being animal)은 실체에 의존해서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실체라고 할 수 없다. 또한 보편자는 이것임의 기준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보편자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것이었는데 보편자가 이것임의 기준을 만족하지 못함은 제 3인간 논증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 ‘사람임’과 같은 보편자는 그것이 사람이기 위해서 또 다른 이데아를 필요로 할텐데 이 사람의 이데아 역시도 사람임이기 때문에 또 다른 이데아를 필요로 하고 이러한 논변을 무수히 발전시킬 경우 사람의 이데아 (혹은 사람임의 보편자)가 무수히 많아지게 된다. 다시 말해,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보편자가 무수히 많아지게 됨으로써 이것임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자는 실체가 아니다.
이제 기체가 왜 실체가 될 수 없는지를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기체는 다른 것들에 의해 서술될 수는 있지만 술어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기체는 질료일 수도 있고 형상일 수도 있고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일 수도 있다. 실체인 소크라테스가 주어 자리에 올 수 있듯이 기체 역시 주어의 자리에 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실체의 후보가 될 수 있어 보이지만 분리성과 이것임의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먼저, 기체가 질료라고 해보자. 질료라는 것은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의 속성들을 모두 제거하고 난 후에 남은 무엇이다. 그런제 질료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임’이라고 말해질 수 없다. 다시 말해, 질료는 형상과 결합해서 무엇이라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에 실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실체가 질료와 형상의 복합체라고 해보자. 이 경우도, 복합체는 이것임을 말하는데 있어 질료와 형상에 의존하게 되므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개체로써의 실체가 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남은 것은 형상이고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이 가장 참된 의미에서의 실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실체론의 아포리아는 여기서 시작된다. 형상은 가장 참된 의미로 정의 가능하고, 앎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앎의 대상은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앞서 그는 보편자가 실체가 아니라고 했다. 만약 실체가 보편자가 아니라면 이는 정의할 수도 없고 앎의 대상이 될 수도 없으니 모순적이게 된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책은 앞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보편자’라고 말한 것은 플라톤적 이데아를 말하는 것이며 그가 말하는 ‘앎의 대상으로써의 보편’과는 구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플라톤적 이데아는 개체와 분리될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은 개체와 분리된 것은 아니다. 이는 구체적 개체와 결합된 개체 속의 본질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형상은 곧 실체이며 개체 속의 본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실체는 개체로서의 본질과 형상으로서의 본질을 모두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실체인데 개체로서의 본질은 앎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정의될 수 없으나 사람이라는 형상으로써의 본질은 정의될 수 있고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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