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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을 용기의 덕과 관련해 양적·바람직성의 기준을 통해 설명해 봅니다.

by 로짘 2020. 2. 23.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선(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바라봤다. 또한 이는 인간이 지닌 고유한 기능인 이성(logos)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에게 행복은 이성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탁월하게 잘 행동하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이 탁월성’(atretè)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탁월성은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게 만드는 품성상태이며 이는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중간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중간을 각각의 끝에서 같은 거리만큼 떨어진 것으로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중간이라고도 설명하며 탁월성의 중용에 대해 언급할 때는 마땅히 그래야 할 때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사람들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이 중간이자 최선이며 바로 그런 것이 탁월성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중간을 벗어나서 지나치거나 모자라게 되면 이는 악덕이 된다. 다시 말해, 중용은 두 악덕의 중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탁월성의 중용에 대한 해석은 그것을 산술적 비례에 따르는 중간으로 직접적으로 해석하는 양적인 해석과 이를 비유로 고려해 경우, 대상, 이유, 목적, 방법 등에 있어서 바람직한 판단을 하는 것이 중용이라는 해석이 존재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하는 중용의 예에는 용기와 절제 그리고 관대가 있다. 용기는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용이며, 절제는 방종과 무감각의 중용이고 관대함은 낭비와 인색의 중용이다. (또한 그의 공적주의 정의관에 있어서도 정의는 중용이다. 정의란 옳은 사람 - 비례를 따라서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사람 -으로 하여금 그 선택에 의하여 옳은 일을 하게 하는 덕이며 이는 균등하지 않고 너무 많이 주는 것과 너무 적게 주는 것은 중용이라고 할 수 있다.)

 

(1) 엄슨의 양적 해석: 용기

 

특히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용기에 대한 입장을 어떻게 해석하는 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지나침과 부족함이라는 악덕 사이의 중간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지나침, 부족함과 그 중간의 탁월성(중용)이라는 세 가지 마음가짐이 존재함을 말한다. 그래서 용기는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용이되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양적 해석을 따른다면 비겁함과 부족함의 지점들 사이에서 조율하여 그 중간 지점의 마음가짐을 지니는 것이 용기가 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감한 사람은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 것을, 마땅한(바람직한) 이유에서, 마땅한 방법으로, 마땅할 때에 참고 견디며 두려워하는 사람이라고 한 바있다. 다시 말해, 그의 용기를 지나침과 부족함의 정도를 옳음의 기준으로 고려하지 않고 다양한 상황들에 있어서 바람직한(마땅한) 판단을 그 기준으로 고려할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양적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은 특정 상황에서는 용기있는 사람과 무모한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할 수 있으므로 용기가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간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마을에 침략자가 들이닥쳤을 때, 무모한 사람과 용기가 있는 사람은 이들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비겁한 사람은 도망갈 것이다. 중용에 대한 양적 해석을 따른다면, 무모한 사람과 비겁한 사람이 악덕을 행한 것이 되어야 하지만 무모한 사람과 용기있는 사람의 행위는 같기에 비겁한 사람만이 악덕을 행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용에 대한 양적 해석을 지지하는 엄슨(Urmson)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성품적 탁월성을 감정과 행위에 관련하여 중용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했던 것이지 감정과 행위의 중간을 향한 마음가짐이라고 했던 것은 아님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성품적 탁원성은 중용을 향하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중용에 따르는 마음가짐이며 어떤 마음가짐은 항상 중용의 마음가짐이 되거나 지나침이나 모자름의 악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중용의 성품이 될 수도 있고 지나침과 부족함의 성품이 될 수도 있다고 설명한다.

 

 

엄슨은 용기에 관해서도 유사한 입장을 유지한다. 용기 역시 경우마다 다르게 나타날 수 있고 언제나 이러한 마음가짐을 향하는 것이 성품적 탁월성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중용에 대한 양적해석을 따를 경우, 용기는 무모함과 비겁함의 중간에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설명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이에 대해 엄슨은 중용에 대한 양적 설명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용기의 양 극단을 잘 못 설명했다고 대응한다. 엄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의 깊음용기를 혼동했으며 이로 인해 용기의 양 극단을 비겁함과 무모함으로 설명하는 문제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그는 무모함이란 주의 깊음이 매우 부족한 상태를 의미하며, 이것의 극단은 비겁함이 아니라 과도하게 주의 깊은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용기는 있으나 신중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매사에 지나치게 신중하나 용기를 가진 사람 역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주의 깊음의 영역과 용기의 영역은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는 비겁함과 두려움이 전혀 없음의 중용이 된다고 말한다.)

 

(2) 허스트하우스의 질적 해석: 절제, 관대함.

 

허스트하우스(Rosalind Hursthouse)는 엄슨의 중용에 대한 양적 해석이 옳지 않으며 중용이란 다양한 기준들에 있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엄슨의 해석이 기본적으로 하나의 성품이 두 가지 방향에서 잘못될 수 있음을 전제한다고 주장한다. , 그의 양적 해석에 걸맞게 과함과 모자람의 틀에서 성품을 해석할 경우에만 이는 올바르며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러한 전제를 가졌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용에 관한 양적 해석을 비판하는 허스트하우스는 특히 관대함과 절제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관대함은 인색함과 방종 사이의 중용이라고 생각되어질 수 있지만 관대함은 지나치거나 부족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관대하다는 것은 돈을 쓰는 것과 그 결과의 가치 사이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문제이지 많이 썼느냐 적게 썼느냐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색함과 방종 역시 많거나 적거나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사용함에 있어서 판단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절제는 무감각과 방종 사이의 중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허스트하우스는 절제를 욕구와 관련된 성품으로 보고 이것 역시 특정 욕구가 과하거나 모자람의 방식으로 절제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특히 그녀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방종한 사람들을 좋아해서는 안 되는 대상을 잘못된 방식으로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한 측면을 언급한다. ,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을 볼 때, 중용을 과도함과 부족함의 측면으로 설명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식욕이 지나친 사람을 방종한 사람으로 본다면 사람까지 먹는 사람도 방종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데 이는 미친 사람이지 방종한 사람은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나치게 많은 대상이 방종의 악덕을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절제 있는 사람을 말할 때는 단지 건강을 해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것을 피하려고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이는 방종한 사람이 단지 건강을 해칠 정도로 과하게 음식을 먹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에 명예롭지 않은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중용에 관한 양적 해석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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