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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 방법론이 지니는 차이와 긴장에 대해

by 로짘 2020. 2. 19.

플라톤은 사유의 참된 대상은 물질적 현상계가 아니라 불변하고 영원한 이데아라고 주장한다. 실재의 세계는 가시계가 아니라, 영원한 형상들로 구성되어있는 가지계이다. 플라톤은 개별자들이 존재하는 현상계와 개별자들이 존재 근거가 되는 이데아계를 분리시킨다. 현상계의 개별자들 각자는 그것들에 대한 이데아가 있고 이 개별자들은 이데아계에 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기에 이데아계는 현상계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현상계의 개별자들은 우리 감성으로 알 수 있는 것인데 반해 이데아계에 있는 것은 오직 지성(nous)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데아들 중에서도 모든 이데아의 본(paradeigma)이 되는 최상의 이데아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좋음(to agathon)의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좋음의 이데아가 지닌 내용이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에 태양과 좋음의 이데아를 유비 관계에 놓고 이를 설명한다. 이것이 태양의 비유이다. 태양은 가시적 세계의 보이는 것들(, 색깔)과 보는 힘(시각)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시적 실체들의 생성과 성장의 원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좋음의 이데아는 가지적 세계에서 인식되는 것들(진리, 실재)과 이를 보는 힘인 지성을 통한 인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가지적 실체들의 생성과 성장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태양이 그 자체로 생성이 아니듯 좋음의 이데아 역시 인식되는 것들에 대해 그 지위와 힘에 있어 그 존재를 초월한다. 이렇게 그는 태양의 비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를 설명하고 다음으로 선분의 비유를 통해 가지계와 가시계에 놓인 각 존재들을 분류한다. 마지막으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결박되어 촛불에 비친 상만을 바라보고 있는 죄수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모사로서 진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것이다. 죄수들이 결박에서 풀려나 동굴 속에서 보는 것들도 결국은 햇빛에 비추어진 것으로 참된 세계에 해당한다. 진실로 참된 세계는 동굴 밖의 세계로 이데아의 세계라는 것이 동굴의 비유가 설명하는 바다. 이와 같이 동굴의 비유는 어떤 층위의 본이 되는 다른 층위가 있음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경험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근거가 되는 초경험적 사실(혹은 원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를 따를 경우 어떤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그 존재의 기초가 되는 것이 존재해야 한다. 그래서 이 모든 존재의 기초가 되는 것이 이데아가 된다는 것이다.

개별자들의 본이 되는 이데아를 형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형상은 개별자들의 존재의 원인이자 본질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개별자들은 형상을 분유, 모방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가 분리될 수 없으며 실재적인 선과 미는 현실적인 개체 또는 개별사실들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하며 플라톤을 비판한다. 다시 말해, 플라톤은 현실세계와 이데아계를 분리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계를 현실세계로 끌어내려 이를 일원화 했으며 플라톤이 이데아인 형상과 개별자(질료)를 분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거부했다.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3인간 논증을 통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다.

 

3인간 논증은 어떤 사람이 사람의 이데아에 참여하기 때문에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사람의 이데아 둘을 모두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제3의 인간 이데아가 존재하여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있는 파르메니데스편에서 처음 소개된 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형이상학에서 변형하여 제시한 것이다. 3인간 논증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있어 분리의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어떠한 존재가 있기 위해서는 그 보다 초월적인 존재를 요구한다. 여기서 파르메니데스의 예를 생각해보자. 먼저 우리는 현상계에서 큰 것들의 집합 A를 생각할 수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집합 A에 속한 것들의 존재는 큼의 이데아 I에 의해 존재할 수 있다. 그런데 큼의 이데아 I 역시 큰 것이다. 따라서 큰 것들과 큼의 이데아 I를 모두 포함한 집합 B를 생각할 수 있다. 집합 AB는 서로 다르다. 그렇기에 집합 B의 대상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 다른 큼의 이데아 II를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큼의 이데아 I과 큼의 이데아 II를 우리가 지니게 된다면 이는 이데아의 유일성에 어긋난다. 이는 모순이므로 어떤 개별자가 존재하기 위해 현상계에서 동떨어진 이데아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은 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제시된 논증을 확장할 경우 우리는 큼의 이데아 I, 큼의 이데아 II, 큼의 이데아 III 등과 같이 무수히 많은 이데아를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의 이데아 역시 무수히 많이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선의 이데아를 지니게 된다면 우리 인간이 파악해야 하는 이데아는 어느 것인가를 물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방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대해 비판한다. 수학적 정답처럼 선의 세계가 규정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는 doxa의 영역은 인간이 사는 세계이므로 우리의 결단은 잘못될 수 있고 반례가 가능함을 인정한다. 또한 실재적인 선과 미는 현실적인 개체 또는 개별사실들 속에서만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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