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되는 이상국가의 정의의 원리는 국가뿐만이 아니라 통치자, 전사 그리고 생산자 계급의 영혼에까지 적용되는 개념이다. 플라톤은 <국가>편에서 국가의 단일성 혹은 통일성은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최고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라를 하나로 묶어주고 하나로 만들어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국가>에서는 이상국가의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국가를 통치하는 계급인 통치자와 국가를 잘 수호하는 계급인 수호자 그리고 국가의 의식주를 담당하는 생산자 계급이 존재해야 함이 제시된다. 또한 이들이 각자가 자신의 배정 받은 직분을 충실히 이행할 때, 정의로운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원리는 국가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적용되며 개인이 자신의 직분에 맞는 정의로운 영혼을 지닐 때, 국가의 정의역시 성취될 수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국가> 4권에서 소개된 영혼의 정의에 대해 알아보자. 플라톤에 따르면 영혼은 이성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뉘며 비이성적인 부분은 이성에 순종하는 부분으로써 기개가 존재하며 이성에 불복하는 부분으로 욕구가 존재한다. 이성적인 부분은 기개와 욕구를 통제하지만 기개와 욕구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며 이들의 영혼이 지닌 목적을 위해 함께해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영혼은 어떤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할 덕을 지닐 수 있는데 이를 위해서 영혼은 각 부분이 각 본성이 요구하는 바를 행하여 각자의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이성도 기개도 욕구도 그에 맞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성은 지혜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이성이 기개와 욕구를 잘 이끌어 욕구에 동요되지 않고 참된 이상을 잘 지켜나갈 때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욕구는 절제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이는 한계와 정도를 지켜서 영혼의 다른 부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절제의 덕이 성취된다. 기개는 용기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성급한 행동을 피하고 공격과 수비의 행위에서 적절한 힘을 발휘할 때 용기의 덕을 갖추게 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가지 부분들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잘 수행하여 내적조화를 성취할 때, 네 번째 덕인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혼의 덕과 정의에 대한 입장은 이상국가를 구성하는 통치자와 전사 그리고 생산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먼저 통치자는 이성이 지닌 지혜의 덕을 지녀야 하며 오랜 기간의 교육을 통해 이 능력을 실현시켜 좋음의 이데아를 직관하게 된 철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호자는 기계가 지닌 용기의 덕을 지녀야하고 재산과 부인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용기는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아는 것이기에 전사들은 결코 가난이나 빼앗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생산자인 기술자와 장인은 욕구가 지닌 절제의 덕을 지녀야 하며 자신의 본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절제의 덕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정의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보이지만, 반대로 정의로운 행위를 한 사람이 정의로운 영혼을 가졌는가에 대해서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플라톤 역시 <국가>에서 정의로운 영혼을 규정할 때, 정의로운 영혼이 반드시 정의로운 행위를 할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정의로운 행위가 과연 올바른 영혼을 함축하는가? 만약 그것을 함축한다면 국가의 구성원들은 정의로운 영혼을 함축하는 정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는가?
클라우트는 정의로운 행위를 행함은 정의로운 영혼을 가지는데 대한 충분조건이 아닌 필요조건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남을 속이기 위해 가식적으로 정의로운 행위와 같은 행동을 취했다면 이는 외형적으로 정의로운 행위일 뿐 그 사람이 정의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경우, 정의로운 행위는 정의로운 영혼을 함축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플라톤은 이러한 우연적인 행위는 지성(nous)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정의로운 행위라고도 할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보다 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앞서 얘기했듯이 정의의 덕은 이성과 절제와 용기의 덕이 내적 조화를 이룰 때 성취될 수 있다. 통치자는 지혜의 덕을 지녀 이데아를 직관한 철인일 수 있기 때문에 이성과 절제와 용기의 덕에 대한 내적 조화를 이룬 정의의 덕을 이해할 수 있고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영혼을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지성을 지닌 통치자는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영혼의 일치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지만 수호자, 생산자 계급은 지혜의 덕을 지니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정의로운 행위를 한다고 해서 정의로운 영혼을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남긴다. 즉, 정의로운 행위가 정의로운 영혼을 항상 함축한다면 국가의 구성원인 수호자와 생산자는 정의로운 행위 자체를 못할 수 있는 것이다.
벨트만은 플라톤의 정의를 시민적 정의와 플라톤적 정의로 구별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먼저, 시민적 정의란 평범한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 정의이고, 다음으로 플라톤적 정의는 철학자들이 가질 수 있는 정의이다. 시민적 정의는 외적 조건과 내적 조건을 지닌다. 먼저 외적 조건은 습관/관행에 의해 정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으로 정의에 대한 지식을 결여하고 있다. 내적 조건은 교육을 통해 정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벨트만은 외적 조건과 내적조건을 모두 만족시켰을 때, 시민적 정의를 성취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정의에 관한 참된 믿음은 가졌으나 행위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정의로운 행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벨트만은 평범한 시민들은 플라톤적 정의를 갖추지 못하더라도 문제는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플라톤 본인의 입장에 따르면 국가의 각 구성원들은 각기 이성에 의해 지배 받는 자가 있고, 기개 혹은 욕구에 의해 지배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이성이 지닌 덕인 지혜의 덕을 지닐 수 있지만 수호자와 생산자는 그렇지 않다는데서 벨트만은 시민들이 플라톤적 정의를 지니지 못함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벨트만의 설명은, 통치자 이외의 사람들이 어떻게 정의로운 행위와 정의로운 영혼을 일치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한 대답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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