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Bueno and M. Colyvan, "Logical Non-Apriorism and the 'Law' of Non-Contradiction," The Law of Non-Contradiction, ed. G. Priest, JC Beall, B. Armour-Garb.
1. 도입
논리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논리철학에서의 논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논리학을 전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논리학에서 이론 선택을 할 때, 그 어려움은 특히 두드러진다. 두 개의 논리 이론 사이에서 선택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각의 이론에 대해서 증거와 논증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증거와 논증은 어떤 논리학의 맥락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논리학은 또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무한퇴행에 빠지는 것 아닌가?
LNC와 같은 근본적인 논리 원칙에 대해서 어떻게 논쟁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문제는 더 악화된다. 많은 사람들은 그 작업이 무망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LNC와 같은 근본적인 원칙을 거부하면 토론의 토대가 없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관주의는 옳지 않다. LNC와 같은 근본적인 원칙에 대해서도 논쟁할 수 있고, 그 가능한 방법을 보이는 것이 이 글의 목표 중 하나다.
2. 비선험주의 논리학
논리학은 선험적이지 않고, 특히 LNC에 대한 논쟁이 전적으로 선험적인 용어로 수행되는 것이 아니다. “논리 외적인 고려를 통해서 논리 원칙과 논리 법칙이 수정될 수 있고, 논리 외적 고려는 논리 원칙의 선택과 평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비선험주의 논리학을 옹호하는 것이 이 절의 핵심이다.
2.1 양자역학으로부터의 논증
고전 논리학이 양자역학의 영역에 적용될 때 옳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
① (Ex=+1/2) ∨ (Ex=-1/2)
② (Ex=+1/2)
③ (Ex=+1/2) ∧ [(Ey=+1/2) ∨ (Ey=-1/2)]
④ [(Ex=+1/2) ∧ (Ey=+1/2)] ∨ [(Ex=+1/2) ∧ (Ey=-1/2)]
①: 모든 전자는 X 방향으로의 스핀 값을 +1/2이나 -1/2로 갖는다.
②: 어떤 전자 E의 X 방향으로의 스핀 값이 +1/2이었다고 하자.
③: ②의 연언 도입
④: ③의 분배법칙
그런데 ④는 거짓이거나 무의미하다! E의 X 방향과 Y 방향으로의 스핀값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전논리학을 토대로 삼는다면 곧바로 개념적인 어려움에 부딪힌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고전논리학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있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론의 도입일 텐데, 그 이론은 독립적인 증거나 그 이론이 ad hoc이 아니라는 보장이 필요하고, 그러한 요구조건이 만족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고전논리학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양자논리학으로 옮겨감으로써 양자역학에 의해서 제기된 해석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은 경험적인 고려에 근거해서 수정될 수 있다는 것, 즉 논리학이 선험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2.2 타르스키의 논리적 선험주의에 대한 옹호 논변에 대하여
타르스키는 논리적 귀결의 필요조건으로 대체 요건(substitution requirement)을 제시한다.
SR: K (문장집합)와 X(문장)에 등장하는 순수하게 논리적인 상항을 제외한 다른 상항들을 다른 상항으로 대체해서 K'과 X'을 얻으면, K'와 X'의 귀결관계는 K와 X의 귀결관계와 같다. 즉 X가 K로부터 따라 나온다면, X'도 K'으로부터 따라 나온다.
논리적 귀결은 형식적이고, 따라서 논리 외적 고려(특히 경험적 고려)는 논리적 귀결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SR을 전면적으로 적용해야 하는가? 어떤 영역에서 경험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된다면 어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양자 논리학자들이 제기하는 문제이다. SR의 무조건적 적용은 어떤 영역의 특성을 포착하지 못하는 잘못된 논리적 귀결 개념을 낳을 수 있다. 그러므로 SR의 적용을 제한해야 한다. 이렇게 제한함으로써 논리학의 중요한 측면을 파악할 수 있다. SR에 대한 이 같은 제한은 문제가 되는 영역의 특성을 포착하기에 보다 적절한 귀결관계를 제공한다. 이러한 제한은 논리학의 선택에 있어서 비논리적 요소의 도입을 허용한다. 즉 이는 논리학의 선택에서 논리 외적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선험주의 논리이다.
선험주의자들의 불만: 논리학은 우리의 개념적 틀(conceptual framework)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고, 어떤 증거적 체계에 의해서도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논리학이 선험적이지 않다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무한퇴행의 문제를 피하고 논리학이 이러한 역할을 하도록 하려면 논리학을 선험적이라고 해야 한다.
대답: 논리학이 증거적 체계에서 해야 한다고 기대하는 역할, 즉 정당화 역할을 하기 위해서 논리학이 선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논리학이 개념적 특에서 결정적이고 근본적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논리학이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선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논리학이 경험적 논박에 열려 있음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론적 결정(methodological decision)만으로도 충분하다. 요컨대 어떤 논리학의 적합성을 수립하는 데 논리학을 사용해야 한다고 해서, 논리학이 선험적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타르스키가 논리적 선험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선택지.
1) 분배법칙이 성립하지 않음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2) 분배법칙은 성립하지만, 양자 논리학자들의 양자역학에 대한 분석에 오해가 있다.
3) 연언이나 선언은 논리적 상항이 아니다.
이들은 모두 근거 없거나 심각한 다른 문제를 낳을 뿐이다.
2.3 퍼트남의 중심성 논변(Centrality argument)
중심성 논변: 논리법칙은 합리적 논증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우리 사고에 중심적인 것이다. 논리법칙은 논증 행위 자체에 의해서 전제되어서 그것이 전복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
퍼트남은 LNC와 같은 논리법칙도 경험적 근거에서 수정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CA는 LNC와 같은 논리법칙이 직접 관찰에 의해서 전복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 결국 LNC는 선험적이지 않고, 논리법칙도 경험적 근거에서 수정될 수 있으며, 따라서 논리학은 선험적이지 않다. 비록 LNC가 근본적인 논리법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선험적이라고 간주해야 할 이유는 없다.
3. 논리학에서 이론 선택
논리적 선험주의가 옳다면, 무한퇴행의 문제를 피하면서 논리학에서 이론 선택(변화)가 어떻게 가능할까? 과학적 이론 선택 모델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 라우단의 그물 모양의 모델에 따르면, 과학적 논쟁은 세 가지 주된 요소, 과학적 탐구의 목적, 방법, 그리고 과학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걸쳐 이루어진다. 과학 공동체는 항상 이 중 적어도 하나에 대해서 동의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진 공유된 합의는 나머지 두 요소에 대한 논쟁을 해결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예컨대 과학적 탐구의 목적을 공유하면, 그것은 방법에 대한 불일치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용되어 공유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서 그렇게 공유된 방법은 그 방법이 가장 잘 정당화하는 이론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경쟁이론 사이를 조정한다. 그러나 그 세 가지 요소는 층위적이지 않고 순환적이다. (p. 167)
논리학에 관한 논쟁은 논쟁 참여자들이 공유하는 핵심적인 전제-- 논리법칙과 같은 논리 이론, 논리학의 목적, 방법론적 원리--를 포함한다. 이 전제 모두를 공유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 중 하나는 공유하는데, 그것은 논리학에 대한 논쟁을 위해 충분한 공통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논리학에서 고전적인 탐구 전통을 가지고 시작해 보자. 논리학의 목적은 자연언어에서 발견되는 귀결에 대한 직관적인 개념을 포착하는 논리적 귀결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논리적 원리는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식화된다. 이러한 원리들은 기본적으로 고전적인 술어논리의 원리이고, 그것은 다시 특정한 방법론적 결과(논리적 연결사는 외연적이다, 그 체계는 완전하다, 등)를 낳는다. 이렇게 되면, 논리학에서 탐구가 수행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언어에서 직관적으로 타당한 추론이 이러한 논리적 원리에 따르면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질 수 있다. 예컨대,
존은 주말마다 축구를 한다. / 그러므로 존은 주말마다 축구를 할 수 있다.
이 추론은 직관적으로는 타당하지만, 형식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것을 형식적으로 타당하게 만들기 위해서 고전 논리학의 탐구 전통의 그물 모양의 모델의 한 요소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논리법칙(양상 연산자와 관련된 법칙)을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도입은 탐구 전통의 목적에 의해서 정당화 된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법칙의 도입은 방법론적 원리에서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양상 연산자에 관한 법칙은 외연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고전적인 논리학의 탐구 전통에서 새로운 탐구 전통(양상 논리학의 탐구 전통)으로 옮겨 가게 된다. 두 전통은 동일한 목적을 갖지만, 논리법칙과 방법론적 원리에 있어서는 서로 다르다.
4. 무모순의 "법칙"
지금까지 우리는 논리학이 선험적이지 않으며, 특히 논리학에서 이론 선택에 관한 문제는 선험적인 토대 위에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했다. 논리학 이론이 오류가능한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논리학에서 이론 선택의 모델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LNC에 관한한 논쟁의 맥락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LNC와 같은 근본법칙은 모든 논리 이론에서 성립한다는 특권적인 지위와 관련된 것이다. 루이스는 오류가능주의자들도 어떤 원칙에 독단적으로 매달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본적인 논리법칙을 포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빈약한 논리적 자원(resources)만을 남겨 놓게 되어 토론을 진행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루이스의 실제적 관심은 LNC에 대한 논쟁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러한 논쟁이 유용하고 합리적일 수 있는가이다.
물론 그러한 논쟁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용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 논리학 이론 선택의 모델을 LNC의 지위에 관한 문제에 적용해보자. LNC에 대한 찬성논변과 반대논변을 제시하고, 각각의 논변이 (1) 선험적이지 않은 고려에 의존하고 있으며, (2) 그 논쟁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루이스가 인정하는 것보다 많은 점에 동의하고 있음을 보일 것이다.
LNC 찬성 논변
① 참인 모순명제가 있다면, 모든 명제가 참이다. (ex falso quodlibet, explosion)
② 모든 명제가 참이라는 주장(trivialism)은 명백하게 옳지 않다.
③ 그러므로 참인 모순명제는 없다.
②는 경험적 사실이다. 이 논변은 선험적이지 않은 고려에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dialethists들은 고전논리학자들처럼 모순과 고전논리학의 연언은 옹호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②도 받아들인다. 그들이 거부하는 것은 ①이다. 그런 점에서 고전논리학자와 dialethists들 사이에는 공유하는 것이 상당히 많고, 그것이 그들의 논쟁의 토대일 수 있다.
LNC 반대논변
전제 ① T-도식의 만족은 진리론이 성립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전제 ② 자연언어는 의미론적으로 닫혀 있다.
(*) 이 문장은 참이 아니다.
(*)를 위 두 전제에 적용하면 (*)는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인 문장이 있다.
전제 ②는 분명히 경험적 사실이다. 이 논변에 대해서 타르스키는 형식적인 언어의 위계를 갖는 언어로 영어를 대신할 것을 제안하고, 어떤 사람들은 전제①을 의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가 진정한 영어 문장인지를 의심한다. 반면에 양진주의자들(dialetheists)은 이 논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나머지 전제와 추론과정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다시 말해서 이 논변에는 경험적인 고려가 포함되어 있고, 다른 논리적 입장에 서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LNC가 논리학의 근본법칙이어서 그것이 없다면 논쟁이 불가능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고, 논쟁에서 논리 외적인 전제들(T-도식, 자연언어의 의미론적 폐쇄성 등)이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물 모양의 모델은 실제로 논쟁이 진행되고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해 준다. 이 모델에 따르면, 근본적인 논리법칙으로 간주되는 것은 목적이나 방법론적 원리가 재평가될 때 수정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거짓말쟁이 논변을 생각해 보자.여기서 논리적 원리는 고전 논리학의 원칙들이고, 목적은 자연언어에서 발생하는 논리적 귀결을 설명하는 것이며, 방법론적 원리는 T-도식과 자연언어의 의미론적 폐쇄성이다. 그런데 거짓말쟁이 문장은 논리적 원리(이론)과 목적, 방법론적 원리 모두를 만족시키지는 못한다. 즉 문제를 야기한다. 이에 대해서 dialethist들은 방법론적 원리와 목적을 유지하고, 논리적 원리를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반면에 타르스키는 방법론적 원리를 수정할 것을 제안한다. 즉 자연언어의 의미론적 폐쇄성 전제를 포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목적도 수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언어는 의미론적으로 닫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루이스의 주장에 암암리에 담긴 반론을 살펴보자. 즉 LNC와 같은 근본적인 논리법칙에 대한 탐구에 사용된 다른 원칙들은 LNC보다 덜 확실하기(less certain) 때문에 그러한 탐구는 이미 운명이 결정되어 있고 따라서 그러한 탐구의 결과는 LNC보다 덜 확고한 것이라는 반론이다.
이 반론은 일종의 토대론적 인식론을 전제하는데, 그에 따르면 P가 Q보다 덜 확실하다면 Q를 파기하거나 수정하기 위해서 P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토대론에 대한 반론은 너무도 많다. 또 P1~Pn처럼 여러 개 의 P들이 있다면, 각각의 P는 Q보다 덜 확실하다고 해도 그것들의 증거의 무게가 쌓여서 보다 확실한 Q를 파기할 수도 있다. 또한 LNC가 다른 원리보다 더 확실하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다. “trivialism은 거짓이다.”는 것이 LNC보다 더 확실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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