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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적 정당화에 대한 본주어, 그리고 퓨머튼의 이론 비교

by 로짘 2022. 10. 22.

1. 정초론(foundationalism)과 비추론적 정당화(non-inferential justification)

 

정초론은 믿음들 중에 토대(정초)가 되는 기초적(basic) 믿음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믿음들은 그 자체적으로 정당화됨으로서 인식론적 정당화의 무한 퇴행을 방지한다. 기초적 믿음들을 제외한 다른 믿음들은 이러한 기초적 믿음과의 관계에 의해 정당화 된 믿음의 지위를 얻을 수 있다. 다르게 표현하면, 기초적 믿음은, 다른 믿음으로부터의 추론에 의존하지 않고 정당화되는 믿음이므로 비추론적으로 정당화 된 믿음이다.

 

2. 오류 불가능한 믿음(infallible belief)

 

정초론에서 기초적 믿음, 즉 비추론적으로 정당화 된 믿음을 주장할 때, 그 정당화의 요인(justifier)을 내재적인 것으로 국한시키는 전통적인 정초론의 경우에는 회의주의의 문제에 직면한다. 어떻게 기초적 믿음이 외부 세계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 해내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기초적 믿음(비추론적 믿음)을 오류 불가능한 믿음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대해 레러는 다음과 같이 정의를 제안했다. (Fumerton(1995, p. 69))

 

Ia: 만약 t시점에서 SP를 믿는 것이 P가 참임을 함축한다면, t시점에서 SP라는 믿음은 오류불가능하다

 

그러나 오류불가능한 믿음으론 충분치 않다. 만일 누군가 필연적인 참인, 복잡한 수학적 명제를 칠판에 적혀있어서 믿는다고 하자. 그럴 경우, 위 정의에 의하면 이 믿음은 그 명제가 참임을 함축하고 따라서 오류불가능하며, 그러므로 기초적 믿음으로 손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러한 믿음이 정당화 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또한 우리는 명제들 중에서 오류 불가능한 것으로 믿어지기에 충분한 경험적 명제들을 찾기가 어렵다. 암스트롱에 의해 제시된 사례에 의하면, 내가 현재 고통을 느낀다는 믿음조차도 오류가능할 수 있다. 또한 흄적인 논변에 의해, 명제 P에 대한 믿음과 P라는 사실이 서로 다른 사태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관계가 인과적이라 할지라도, 그 함축관계를 거부할 수 있다.

 

 

3. 오류 불가능한 정당화

 

우리는 데카르트적 회의에 의존하여 오류불가능한 믿음 대신, 오류 불가능한 정당화 개념에 호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같은 적용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 예를 들어, 고통스럽다는 믿음을 정당화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정초론자들은 고통 그 자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통스럽다고 느낄 때, 내가 고통스러움을 느낀다는 나의 믿음은 정당화되는 것 같지만, 내가 고통스러움을 느낀다는 다른 이의 믿음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것은 다른 이가 가지고 있지 않은 나의 고통에 대한 접근(access)을 나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앞서 살펴본 내재적 요인만을 인정했을 때 발생하는 여러 난점을 보완하기 위해, 온건한 정초론에서는 감각 경험의 소여에 의해 기초적 믿음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셀라스에 의해 제기된 소여의 신화논변은 감각 경험의 소여를 정당화 요인으로 간주할 경우에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여의 신화 논변은 다음과 같다. 감각소여에 대한 우리의 파악은 명제적이거나 비명제적이다. 그 파악이 명제적일 경우, 이는 또 하나의 믿음이므로 정당화가 요구되고, 이는 정당화의 무한퇴행에 빠진다. 우리의 파악이 비명제적이라고 할 경우, 우리가 정당화가 일종의 추론과정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어떻게 비명제적인 것으로부터 믿음이 정당화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감각 소여는 어떤 경우에도 기초적 믿음의 정당화 요인이 될 수 없게 된다.

 

 

5. 소여의 신화에 대한 퓨머튼과 본주어의 대응

 

감각 경험의 소여를 기초적 믿음의 정당화 요인으로 삼고자 하는 정초론자들에게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딜레마는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해, 퓨머튼과 본주어는 각각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이 둘의 해결책은 외형적 측면에서는 상당히 유사성을 띠고 있지만, 접근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5.1. 퓨머튼의 해결책

 

퓨머튼은 숙지(acquaintance)가 인식적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소여의 신화 문제를 탈피하고자 한다. 러셀에 의하면 숙지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떤 진리의 매개 없이 또는, 어떤 추론과정의 매개 없이, 우리가 직접적으로 의식하는(aware) 그 어떤 것에 대해 숙지를 갖는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퓨머튼에 의하면,

 

숙지는 자기 자신과 개별자(particular), 속성, 그리고 사실 사이에 있는 독특한(sui generis) 관계이다. 하나의 사실을 숙지한다는 것은 어떠한 명제적 지식이나 정당화 된 믿음을 스스로 가지는 것은 아니다. ... 우리는 생각 속에 있는 사실을 나타내는 개념적인 수단을 가지지 않고서도 어떤 속성이나 사실을 숙지할 수 있다. (Fumerton(1995, p. 74))

 

위와 같이 숙지에 대해 설명한 후에 퓨머튼은 보다 구체적으로 소여의 신화 문제의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나의 제안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P라는 사상(thought)(혹은 명제)을 갖고 P라는 사실과 P라는 사상에 대해 그리고, P라는 사실과 P라는 사상 사이의 대응(correspondence) 관계를 숙지할 때에 우리는 비추론적으로 정당화된 믿음 P를 갖는다.
   단일한 숙지의 행위만으로는 지식이나 정당화된 믿음을 산출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적절한 사상을 가질 때에 세 개의 행위가 함께 비추론적인 정당화를 이룬다. 참인 사상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직접 의식 앞(before consciousness)에 있을 때에, 한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없다. (Fumerton(1995, p. 75))

 

퓨머튼의 제안을 적용시킨 사례를 살펴보자. 만일 한 사람이 자신의 시계(visual field)에 빨간 점을 보고 있어서, ‘나는 빨간점을 보았다라는 기초적 믿음을 갖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빨간점을 보았다는 사상을 갖고, 실제로 빨간점이 있는 사실과 사상, 그리고 이 둘의 일치에 대한 숙지를 하게 될 경우, 이 때의 믿음은 비추론적으로 정당화 된 믿음 즉, 기초적 믿음이 된다. 이러한 퓨머튼의 제안에서 생기는 의문점은, 그렇다면 숙지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퓨머튼은 숙지와 대응의 관계는 독자적인 것이라서 달리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한 참인 사상을 구성하는 세 가지 숙지가 직접 의식 앞에 있기 때문에, 이는 개념적이지 않고, 곧바로 정당화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퓨머튼의 설명에 대한 반론으로, 어떻게 각각은 인식적인 속성이 아니면서, 세 가지 숙지의 결합은 인식적 속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 제시 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퓨머튼은 이는 분할의 오류(the fallacy of division)를 범하는 것이라 대응한다.

 

이와 같은 퓨머튼의 제안은 이러한 숙지가 오류불가능한 정당화의 원천이 됨을 보임으로써, 적절한 제안으로 완성된다. 내가 P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다고 할 때, 그 사실은 P를 참으로 만들어 주는 바로 그 사실이다. 따라서 이는 오류 불가능하다.

 

5.2. 본주어의 해결책

 

본주어는 메타 믿음(2차적 믿음)에 대한 정당화를 설명하는 것을 통해, 기초적 믿음에 대한 정당화 또한 설명하고자 한다. 메타 믿음이란, 내가 P를 믿고 있을 경우, ‘내가 P를 믿고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메타 믿음이다. 본주어는 2차적 믿음을 통각적인(apperceptive) 것으로 파악하게 될 경우, 이는 또 다시 현재적 믿음의 일종이므로 순환적이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로젠탈의 고차적 사유이론에 따르면, 의식함은 어떤 심적 상태의 고유한 속성이 아니다. 대신에, 한 심적 상태는 더 고차적인 심적 상태의 대상이 됨으로써 의식적이 된다. 그러나 고차적 사유이론은 계속해서 높은 위계의 심적 상태를 상정해야 하는 악성적 퇴행에 빠지게 된다. 본주어는 이와 같은 해결책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서 자신의 해결책을 제안한다.

 

본주어는 그의 해결책을 위해 구성적(constitutive) 의식, 내장적(bulit-in) 의식을 등장시킨다. 우리는 어떤 경험, 그 경험의 내용, 그 경험에 대한 믿음이라는 세 가지 개념을 구분할 수 있다. 이때, 경험의 내용에 대한 의식은 그 경험의 의식에 구성요소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구성적 의식이다. 다시 말해, 경험을 의식하는 것은, 그것에 내장된 경험에 대한 내용을 의식하는 것을 수반한다. 어떤 두 경험이 서로 다른 이유는 그 경험을 구성하는 내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본주어는 경험의 내용과 경험에 대한 믿음의 관계는 논리적 관계나 인과적 관계가 아닌 기술적 관계(description relation)라고 말한다. 본주어는 소여의 신화 문제는 이 둘의 기술적 관계를 일종의 논리적 관계로 잘못 파악한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이제 구성적 의식을 통한 2차 믿음의 정당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본주어의 설명을 살펴보자. 2차 믿음의 정당화를 구성하는 요소는 1차 믿음을 가질 때 인식 주체가 갖는 두 가지 의식인, 1차 믿음의 내용에 대한 의식과 1차 믿음이 주장되고 있다는 의식이다. 이는 1차 믿음에 내장된 의식으로, 결코 틀릴 수 없는 의식들이기 때문에 2차 믿음의 정당화 근거가 된다.

 

위의 2차 믿음에 대한 본주어의 설명은 감각 경험에 소여에 의한 기초적 믿음의 정당화에도 평행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SP를 믿을 때, S가 특정 감각 경험을 하고, 그 경험에 내장된 경험의 내용을 파악하고, P가 그 경험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파악하는 경우, SP를 믿는 것이 정초적(비추론적)으로 정당화 된다.

 

5.3 두 이론의 비교

 

퓨머튼과 본주어의 이론을 도식화해서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SP를 믿는 것이 정초적으로 정당화되었다.
퓨머튼 본주어
P라는 사실을 숙지 특정 감각 경험을 의식
P라는 사상을 숙지 내장된 경험의 내용을 의식
P라는 사실과 P라는 사상이
서로 대응됨을 숙지
P가 그 경험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파악

 

두 이론은 접근방식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 퓨머튼숙지와 대응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이에 더해 사상 또한 중요하다. 본주어는 경험의 내용과 믿음간의 기술적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이 두 이론은 유사한 외형을 가진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퓨머튼P라는 사실을 숙지함은 본주어의 특정 감각 경험을 의식(가짐)에 대응하고, 퓨머튼P라는 사상을 숙지함은 본주어의 경험에 내장된 경험의 내용을 의식함에 대응하며, 퓨머튼P라는 사실과 P라는 사상이 서로 대응됨을 숙지함은 본주어의 P가 그 경험의 내용을 기술하고 있음을 파악, 또는 그 주체가 이를 파악하는 이상적 위치에 있음과 대응한다. 이러한 대응이 얼마나 적절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이 두 이론이 더 명쾌히 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대응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경험과 믿음을 연결짓는 방식이다. 퓨머튼의 경우에는 숙지와 대응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더 명료히 할 필요가 있으며 (퓨머튼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본주어의 경우에는 경험의 내용과 믿음간의 기술적 관계, 즉 이 둘이 부합함을 파악하는 것은 과연 어떤 인식 상태인지에 대해 명료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1. Richard Fumerton, Metaepistemology and Skepticism (Lanham: Rowman & Littlefield,1995), pp. 69-79.

 

2. Richard Fumerton, 'Speckleed Hens And Objects Of Acquaintance', Philosophical Perspectives, 19 Epistemology, 2005.

 

3. Laurence BonJour & Ernest Sosa, Epistemic Justification (Oxford: Blackwell, 2003), C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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