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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하이데거 전회 이후 해석학 규정에 대해: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by 로짘 2020. 2. 29.

전회라는 사건은 존재자의 실존분석을 통해 존재의 의미에 도달하는 길, 즉 기초존재론으로서의 해석학을 통해 존재론을 완수하려는 길로부터 존재 자체의, 존재론 자체의 길에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이제 하이데거는 기초존재론의 예비적 도움 없이도 존재자체를 그것 자체로부터 사유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후기의 하이데거가 해석학이라는 타이틀을 내버렸다는 지적이 제기되곤 하는데 정작 하이데거 자신은 이를 부인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해석학을 새롭게 정의함으로서 자신의 후기의 시도 또한- 실은 이것이야말로 -해석학적인 것이라 주장하는데, 이 때의 해석학의 주제는 더 이상 존재자의 이해와 해석이 아니라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학의 개념 변경이 결코 작위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기존의 해석학이 이해에만 정위해 왔다는 일방성을 비판하고 해석학의 보다 근원적인 의미, 고대 희랍에 있어서의 hermaneuein의 원래적 의미에로 되돌아가고(전회轉回)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출발점은 플라톤이 그의 대화편 이온에서 밝히고 있는 시인의 관제에 대한 해명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 플라톤이 시인을 헤르메스라는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헤르메스의 과제를 신들의 메시지를 인간의 문자와 음성으로 번역하는 일에 국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시인은 다른 이가 (신이) 말한 것을 전달할 뿐이지 거기에 어떤 주관적이고 자발적 변경(존재자의 적용, 다른 이해와 해석),도 꾀해서는 안 된다. 플라톤의 이러한 헤르메스 해석은 하이데거에게 해석학은 우선적으로 존재의 표현의 문제이지 주어진 표현에 대한 존재자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헤르메스는 운명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Hermeneuein은 소식의 표현이며 그리고 이표현이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표현은 뒤늦게야 비로소 이미 시인에 의해 말해진 것에 대한 해석으로 된다. 해석학적인 것은 우선적으로 해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서 존재의 메시지와 소식의 전달인 것이다. 이 관계는 논리적으로도 자명해 보인다. 일단 표현이 주어져야만 비로소 표현에 대한 이해가 문제시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표현은 이해를 논리적으로 우선하여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즉 존재자의 분석으로부터 존재 자체에 대한 사유로 전회한 하이데거에게 이 관계는 단순한 논리적 우선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하는 존재자에 대한 스스로를 표현하는 존재의 존재론적 우선성의 해석학적 기술인 것이다. 여기서 전회의 해석학적 의미가 밝혀진다. 전회란 존재자의 존재이해로부터 존재 자체의 표현에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전회의 경험으로부터 규정된 해석학 즉 그 근원적 의미에로 되돌아가 살펴본 해석학은 단순한 이해의 기술이 아니라 존재자의 존재를 존재에 있어 고지 하는 기술이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학 규정에 따라 하이데거는 Hermes logios의 과제, 즉 언어의 과제를 존재자의 존재를 전면으로 이끌어 오되, 존재 자신이 스스로 현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는 것 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해석학의 우선적이고 본래적인 과제는 존재자의 존재이해를 단서로 한 존재자의 언어적 존재해석인 것이 아니라 언어에 있어서의 존재 자신의 자기해석이다. 바로 여기서 후기 하이데거에 있어서 언어가 차지하는 체계적 의미가 드러난다. 즉 언어는 존재자의 이해가 수행되는 장소이기에 앞서 존재가 표현되는 장소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본질적으로 해석학적 관련을 규정하는 것은 이렇게 전적으로 존재론적으로 즉 기초존재론적으로가 아니라 해석된 언어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해석학적 관련이란 더 이상 즉 존재와 시간에서와는 달리 존재와 존재자간의 상호적 관련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존재의 이에 단지 화답할 뿐인 존재자에로의 일방적 고지의 관계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해석한다. 후기하이데거에게 는 오로지 이와 같은 존재의 자기해석만이 해석학의 유일하게 유의미한 테마이고 이해하는 존재자는 다만 이를 들으며 이에 다가갈 뿐이지 그에게 어떤 자의적인 이해와 해석의 여지도 남아있지 않다. 즉 여기서는 존재가 보여주는 것과 상이한 어떤 것을 찾아내는 다른 이해의 가능성이 배제되어 있다. 이러한 배제는 동시에 철학으로부터의 존재자의 배제를 의미한다. 이해하는 존재자는 스스로를 존재의 표현에 적응시켜야지 이해되어지는 존재의 의미를 자신의 현재성과 미래성에 적용하는 기투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이제 해석학은 더 이상 기초존재론이 아니라 존재론 자체로 되어 버렸고, 그런 의미에서 해석학의 실마리는 존재자의 존재이해에서가 아니라 존재 자신의 자신에 대한 사유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때의 소유격은 물론 목적격적 소유격이 아니라 주격적 소유격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즉 존재자가 존재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를 사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유가 진행되는 곳이 곧 언어이다. 그러나 이 언어는 우리 존재자가 말하는 언어가 아니라 스스로 말하는 언어이며 존재자의 집이 아니라 존재의 집일 뿐이다. 즉 아직 이 집에 거주하지 못하고 다만 이 집에로의 도상에 서 있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적 현존재는 오로지 지속적인 자기망각을 통해서만 이 집에 도달할 수 있고 거주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이른바 전회 존재자로부터 존재에로의 총체적인 회귀를 존재자 망각의 징후로 간주하는 일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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