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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UK-US춰락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 문제에 대한 개괄적인 흐름

by 로짘 2020. 2. 29.

현대영미철학에서의 심신 문제는 심신이원론에 대한 비판으로 부터 발전했다고 볼 수 있으므로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및 이로부터 파생됐다고 볼 수 있는 부수현상론의 입장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심신이원론이 지니는 문제점으로 부터 부수현상론으로 그리고 그 이후의 입장으로 진행될 것이다.

 

(참고. 심적인과를 중심으로 요약된 문서는 여기를 참고해 주세요.)

1. 심신이원론(혹은 실체이원론)이 지니는 문제점

 

마음(mind)과 신체(body)가 서로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한다는 심신이원론의 입장은 현대 이전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던 입장으로 철학에서는 플라톤으로부터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데카르트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데카르트는 이 세계가 근본적으로 정신과 물체로 나누어져 있으며 같은 방향에서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이란 서로 독립적인 실체로 이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실체이원론이 주로 공격을 받는 지점은 몸과 마음이 독립적인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상호작용한다는 측면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신체는 연장성(extension)을 지니나 마음은 이를 지니지 않는다. 또한 마음은 사유라는 속성을 가지나 신체는 이를 지니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연장성을 갖지 않아서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마음이 어떻게 연장성을 갖는 그래서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와 어떻게 상호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데카르트에게 던진다. 데카르트는 송과선이라는 중간적인 존재를 상정해 이에 대해 대답하거나 심신의 결합(mind-body union)이 다른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없는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개념이라는 식으로 대답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에 대해 엘리자베스 공주는 오히려 마음이 물리적인 것이라고 고려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데카르트에 대한 두 비판은 현대적 입장과 유사한 것으로 바라 볼 수 잇을 것이다. 첫 번째 비판은, 물리세계의 물체를 움직이려면 원인이 되는 대상으로 부터 그 물체로의 운동량이 전이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통해 비교될 수 있다. 비물질적인 마음이 원인이 되어 우리의 몸을 움직인다면 어떻게 비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에너지가 전이되어 물질적인 몸이 움직일 수 있느냐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실체로써의 마음을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비일관적으로 보이므로 이를 버리는 것이 낫다는 그녀의 두 번째 비판은 심신동일론의 태도와 유사함을 살펴볼 수 있다. 결국 데카르트는 심신간의 상호작용(혹은 인과관계)을 설명하기 위해 심신간의 결합을 원초적인 것으로 고려했고 심신간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 심신간의 상호작용을 그 근거로 드는 순환성의 오류를 범한다. 데카르트가 범한 순환성의 오류 역시 짝짓기 관계’(pairing relation)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짝짓기 관계란 어떤 형상이 원인이 되어 다른 현상을 결과로 일으켰을 때 이들 간의 원인과 결과 관계를 일컫는다. 우리 세계에는 무수의 많은 이러한 짝짓기 관계가 있듯이 몸과 마음 사이에도 그런 관계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비물질적 실체가 개입될 때 그 짝짓기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 관계로서 주로 고려되는 것은 지향적 관계(intentional relation)인데 그 지향적 관계라는 것을 따져 보면 이 지향적 관계자체가 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마음이라는 실체가 개입되어 있는 인과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원인과 결과 간에 작용하는 짝짓기 관계의 한 예로 지향적 관계를 고려해보았으나 이 지향적 관계를 설명하려면 다시금 인과관계를 설명해야 되는 순환성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과 몸 사이에 성립한다는 인과관계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심신이원론자들(혹은 실체이원론자들)은 더 이상 대답하기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봉착을 한다.

 

2. 부수현상론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봉착했던 문제는 실체로서의 마음과 신체가 서로 간에 인과적인 영향력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부수현상론을 주장한 헉슬리(Thomas Huxley)는 물체는 정신에 영향을 미치나 정신은 물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해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다. 헉슬리는 마음의 작용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으나 기적소리가 기관차의 물리적 작용에 따라서 부수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듯 마음의 현상 역시 하나의 부수적인 현상으로 우리 두뇌의 물리적인 작용에 의해 생기는 부수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마음과 신체가 서로 다른 실체임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이 물리적인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님마음이 물리적 신체에 독립적인 것은 아님을 주장함으로써 두 입장을 공존시키려던 입장이 부수현상론이었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포퍼(Karl Poper)는 진화론의 자연선택설에 근거해 이를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만약 마음이 생명체의 진화의 산물이라면 인간의 마음은 다른 형질 보다 더 잘 적응하는 형질이기에 자연선택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때, 마음이 자연 선택된 형질이라면 그것은 그러한 형질(마음)을 지닌 유기체(신체)의 적응에 인과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 되므로 마음은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력을 지니는 것이 된다. 즉 정신이 물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입장을 제기함으로써 부수현상론이 피해가려던 심신인과의 문제가 다시 제기되는 것이다. 잭슨(Frank Jackson)은 어떤 형질(마음)이 유기체(신체)에 인과적인 영향력을 지니지 못하더라도 자연 선택될 수 있음을 북극곰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이를 방어한다. 그는 북극곰의 코트(coat)는 굉장히 무겁기에 이 무거운 코트(heavy coat)는 몸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어 환경에 대한 적응도를 떨어뜨려 없어졌어야 할텐데도 무거운 코트는 여전히 진화의 과정에서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이유는 무거운 코트가 따뜻한 코트(warm coat)이기 때문이며 따뜻한 코트에 대한 선택이 있기에 무거운 코트에 대한 자연선택이 발생했다고 여긴다. 말하자면, 인간의 마음이 비록 인과적인 힘을 갖지 못하는 부수현상이더라도 신경생리학적 구조의 부산물로서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왜냐하면 신경생리학적 구조는 진화의 과정에서 자연선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수현상론은 또 다른 비판에 직면한다. 부수현상론자들은 마음이 어떠한 인과적인 영향력도 지니지 않기에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것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존재한다는 추론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말하자면, 나 자신의 정신적인 현상은 내가 직접 인식하기에 신경생리학적인 부산물로 고려하더라도 상관없으나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행동(신체의 움직임)을 관찰함으로써 그것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존재한다고 추론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부수현상론자들은 행동을 일으킨 것은 마음이 아니라 신경생리학적 원인에 의함이며 마음은 신경생리학적 구조의 부산물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시 왜 물리적인 신경생리학적 원인이 비물리적인 정신 혹은 마음을 부수적으로 산출하게 되는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며 사실상 이는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문제였다. 다시 말해, 마음이 신체에 인과적인 영향력을 지니지 않는다고 주장하더라도 심신이원론적 사고는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물리주의적인 대안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3. 행동주의

 

논리적 행동주의(logical behaviorism)는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이 마음을 본질적으로 사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으로 고려해 단일한 주체만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사적 극장으로 간주했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 경우 타인의 마음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해져 버린다고 비판한다. 문장의 의미는 그것의 검증 방법이라는 논리실증주의를 지지한 햄펠(Hempel)은 데카르트적 심신이원론의 전제는 타인의 마음에 대한 검증을 불가능하게 하니 마음은 공적으로 접근가능하며 간주관적(intersubjective)으로 검증가능(타인이 표현한 내용의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검증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우리가 공ㄹ적으로 접근가능하며 간주관적으로 검증가능한 것은 타자의 행동 밖에 없으므로 심적 표현들의 의미는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에 준거해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신체적 사건 및 조건(상태)들을 모두 행동이라고 할 때, 행동주의자들이 선호하는 한 방식은 예를 들어 인간이 고통을 느낄 때, 표출하는 행동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많은 문제에 봉착한다. 첫째로, 이러한 시도가 받아들여지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그것을 항상 행동으로 표출해야 하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는 고통을 행동으로 표출할 신체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함축한다. 하지만 그러한 신체 기관을 지니지 않아 고통을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생명체도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므로 고통이 고통스런 행동의 표출을 항상 함축한다는 주장은 문제가 많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번역이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고통보다 상위에 있는 인지상태, 예를 들어 믿음에 대한 것은 행동주의적으로 번역하기 힘들다. ‘리만 가설이 참이라고 믿는다.’는 믿음과 리만 가설이 거짓이라고 믿는다.’는 두 믿음이 어떤 분명한 행동상의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하기는 힘들 것이다. 결국 행동주의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언어적 행동의 차이를 고려하는 것이며 이 경우 언어적 행동이라는 것은 심리적 요소를 포함하니 여전히 문제가 될 것이다. 더 나아가 행동은 관습, 습관, 규약 등 사회적인 심리요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는 데서 행동이라는 것을 전적으로 심리적인 측면을 배제한 물리적인 것으로 고려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4. 심신동일론(Mind-Body identity theory)

 

심신이원론을 비판한 또 다른 방향은 인지과학 및 두뇌에 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심신동일론이 제기된다. 이들은 우리의 정신적 심리상태라는 것은 두뇌의 상태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입장을 지니며, 정신적인 것이 따로 있다면 뇌가 어떻게 되던 정신이라는 것이 동일해야 할텐데 치매 환자나 뇌에 이상이 생긴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신(실체)이원론자들은 신체기관으로서의 두뇌 이상의 어떤 것이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해 왔다고 설명한다. 심신동일론자는 고통과 C-신경섬유의 작용(C-fiber activation, 줄여서 Cfa로 적겠다.)이 경험적 진리로서 동일한 지위를 지닌다고 여기며 이러한 입장은 심신이원론과 비교해 설명적 단순성을 장점으로 지닌다.

 

이러한 심신동일론에 대해 심적 상태와 뇌의 물리적 상태는 서로 차별 지을 수 있는 속성에 존재한다는 세 가지 인식론적 반론이 있어 왔다. 첫째로 고통이 Cfa라고 여기는 동일론자들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이 같다고 여김으로써 심적인 것을 아는 것이 물리적인 것을 아는 것으로 여기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 둘은 인식론적으로 차이가 남에도 같다고 여기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며 고통을 아는 사람은 Cfa도 알아야 한다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원론자는 비판자들이 말한 동일성은 경험적 동일성이며 이러한 비판은 ‘S X를 알고, X=Y이면, S Y를 안다.’를 전제하니 잘못됐다고 말한다. ‘S X를 알고 X=Y를 알면, S Y를 안다.’를 전제로 고려할 경우 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식론적 반론은 감각질(qualia)의 문제와 관련된다. 감각질이란 아픔이나 간지러움 등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독특한 느낌을 일컫는데 고통이란 상태는 이러한 감각질을 지니나 Cfa는 그렇지 않으니 이 둘은 서로 다른 현상적 속성을 지니고 그래서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로어(Brian Loar) 속성’(property) 대신 개념’(concept)을 도입해 이에 대응한다. 그는 아픈 느낌을 말할 때 고통에 관한 개념과 Cfa를 말할 때, 신경생리학적 개념들이 다르다고 해서 이들이 지닌 속성이 다르다고 여기는데 이는 속성이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속성을 고통이라는 현상적 개념과 Cfa라는 물리적 개념으로 서로 다르게 개념화한 것 뿐이라고 설명한다. , 하나의 동일한 속성을 어떤 개념에서 인식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세 번째 인식론적 반론은 심적 상태는 사적 지식의 대상이 되나 두뇌상태는 공적 지식의 대상이 되는데 심신동일론의 논제는 이런 서로 다른 대상을 동일하다고 놓는 오류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이에 심신동일론자는 Cfa와 고통을 서로 다른 인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이라고 대응한다. 말하자면, 같은 대상을 다른 현시양식(mode of presentation)을 통해 인식했기에 그런 것이지 그 대상이 다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심적인 mode에서 인식할 경우 우리는 이를 고통으로 표현하며 물리적인 mode에서 인식할 경우 우리는 이를 ‘C-신경섬유 작용’(Cfa)으로 표현하는 것이지 이것들이 서로 다른 인식의 대상을 지닌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퍼트남(Hilary Putnam)은 다수실현 논변(multiple realizability argument)을 통해 일원론을 강하게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고통은 인간 이외에 지렁이나 강아지 등의 다른 생명체들을 통해서도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고통을 Cfa와 동일하게 보는 것은 인간만을 고려했기에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고통이 Cfa이고 지렁이의 고통이 K-신경섬유의 작용(줄여서, Kfa)이라면 물리적으로 서로 다른 Cfa Kfa를 같다고 해야하는 문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퍼트남은 생물의 종에 따라 고통이라는 심적 상태 유형(mental state type)을 실현시키는 물리적 상태 유형(physical state type)이 각각 다르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5. 기능주의

지금까지의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은 다소 존재론적인 방향에서 고려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기능주의는 마음이라는 것이 독립적인 실체이야 아니냐를 따지기 보다 마음이 수행하는 기능적인 문제에 더욱 집중한다. 물리주의를 받아들이냐 아니냐 등의 차이를 통해서도 기능주의는 다방면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적인 방향은 퍼트남의 다수실현 논변에 대한 대답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쥐덧이라는 것은 그것이 나무로 만들어졌던 철로 만들어졌던 쥐를 잡는 기능을 지닌다면 그것을 쥐덧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능주의자는 인간의 심적 상태 역시 어떤 특정 신경섬유에 의해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심적 상태의 입력으로 부터 그와 관련된 행동상의 출력을 제시하는 기능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생각한다.(말하자면, 마음의 속성은 기능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기능주의는 심적 상태가 신체와 인과적인 관계에 있다는 측면에서 부수현상론과는 다르며 내적 상태(internal state)를 규정할 때, 행동 개념을 끌어들이지만 내적 상태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 심적 상태가 행동과 다름 없다고 보는 행동주의와도 차이가 있다. 이는 기능주의는 내적 상태 자체가 실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고통스러운 상태가 Cfa의 작용이라는 신경생리학적 상태가와 동일시하는 심신일원론과도 다르다. 기능주의는 이러한 신경생리학적 상태가 입력되어 그에 관한 결과를 출력할 때, 이 입력과 출력의 사이에서 인과적인 역할을 하는 내적 상태를 심적 상태라고 고려한다. 기능주의는 실체로서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심신이원론과도 다르나 적어도 심적 상태를 세계에서 일어나는 인과적 역할을 하는 현상 중의 하나로 고려하는 데서 극단적인 물리주의의의 입장인 심신일원론과도 구별된다. 또 다른 기능주의의 특징은 심성(mentality)에 대해 holistic한 개념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한 심적 사건(mental event)의 동일성(identity)을 결정해 주는 것은 그것과 인과적으로 연결된 다른 심적 사건들이고 이는 또 다른 심적 사건들과 인과적 관계에 의해 동일성이 결정됨으로써 전체적인 전산망(network)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한 심성을 설명할 때 개별적인 것에 의해 그것의 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체계에 근거해 각각의 신적 사건들의 동일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능주의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은 네 가지로 고려될 수 있다. 첫 번째 논변은 썰(John Searle)의 중국어 방 논변이다. 예를 들어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에 들어가있고 이 사람에게 중국어를 옮기는 정교한 메뉴어이 주어졌다고 하자. 그리고 이 사람에게 중국어로 무엇인가를 묻는 입력(input)이 들어가고 이 사람은 그가 지닌 메뉴얼에 따라 답을 출력(output)한다. 이 방안에 들어간 사람은 중국어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메뉴얼을 통해 중국어를 아는 사람과 똑 같은 대답을 출력할 수 있다면 이 과정만을 통해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썰은 심적 상태를 계산기계(computing machine)의 기능에 비유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의 마음을 단순한 컴퓨터에 비할 수 없으며 컴퓨터의 기능을 유비로 마음을 설명할 때에는 의미를 이해하는 능력과 이해하지 못하는 기계적인 번역의 차이를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비판은 감각질과 관련된다. 예를 들어 A가 빨간색 물체를 볼 때 갖는 감각적 상태에 관한 느낌(감각질) B가 초록색을 볼 때 지는 감각적 상태에 관한 느낌과 같으며 A는 빨강에 대한 심적 상태를 입력 값으로 가지고 B는 초록색에 대한 심적 상태를 입력 값으로 가질 때, 둘의 행동으로써의 출력은 항상 같은 경우를 상상해 보자. 말하자면, A B의 심적 상태는 근본적으로 다르나 기능주의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감각질은 없으니 입력과 출력 면에서는 인간과 동일한 로봇을 상정할 수도 있다. 이 경우 기능주의는 감각질을 지닌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세 번째 비판은 혼선된 두뇌의 예이다. 이 경우는 감각질의 경우와 유사하다. 만약 어떤 사람의 뇌의 상태가 혼선되어 고통에 대한 심적 상태가 입력으로 들어갈 때, 가려움에 대한 행동을 출력으로 제시하고 가려움에 대한 심적 상태에 고통에 대한 출력을 제시한다면 기능주의는 이 사람의 심적 상태에 대한 차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네 번째 비판은 심적 속성의 인과력과 관련된다. 기능주의는 심적 속성(상태)의 다수실현 가능성과 심적 실재론(mental realism)을 받아들임으로써 심적 속성이 인과력을 지님에 대해 인정한다. 하지만 만약 심적 속성이 다수실현 가능하게 된다고 하면 $M_1$이란 심적 속성은 $Q_1$, $Q_2$, $Q_3$ 등의 다양한 종류의 물리적 상태에서 심적 속성이 실현된다. 문제는 $Q_1$, $Q_2$, $Q_3$ 각각의 물리적 상태에 따라 $M_1$이 지니는 인과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쥐덧은 플라스틱으로 그리고 나무로 혹은 철로 만들어져 있을 수 있으니 쥐덧이 지니는 인과력은 인과적 역할을 하고 기능하는 그것의 부품에 따라 달라진다. , 쥐덧이 인과력을 지님은 그것의 기능을 실현시키는 물체의 인과력을 말하는 것과 같게 된다. 그러므로 심적 상태 $M_1$이 지니는 인과력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물리적 상태를 선언(disjunction)으로 연결 시킨바가 된다. 즉 $M_1 = (Q_1 \lor Q_2 \lor \cdots \lor Q_n)$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따를 때 은 단일한 인과력을 발휘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말하자면 쥐덧의 속성은 나무로 만들어져있거나 쇠로 만들어져 있거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속성을 지닌다고 말해야 하며 이러한 이질적인 속성들을 선언으로 연결했을 때 이것이 도데체 어떠한 종류의 인과력을 지니는 것이냐는 물음이 가능한 것이다. 심적 상태가 체계적인 통일성을 결여하게 됨을 지적한 이러한 비판에 의해 기능주의는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과 심적 속성의 인과력에 대한 전제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6. 유형물리주의(Type physicalism)

 

기능주의의 위와 같은 한계성은 심신동일론으로 사람들을 다시 이끌었다. 퍼트남의 다수실현 논변에 막혔던 심신동일론은 고통이라는 유형(type)은 물리적인 Cfa가 지닌 유형과 같다는 방식으로 입장을 수정해 유형물리주의’(type physicalism)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유형물리주의는 다소 실용주의(pragmatism)적 측면에서 주장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어떤 가설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현재에 검증할 수 없더라도 그 가설이 설명을 요구하는 현상을 다른 경쟁 가설들에 비해 잘 설명해 준다면 그 가설을 선호할 명분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심신동일론(유형물리주의)이 심신간의 상관관계(mind-body correlation)나 혹은 심적 현상에 대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니 이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유형물리주의가 심신간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 준다는 주장은 힐(Hill)과 맥로글린(Mclaughlin)에 의해 주장된다. 둘의 주장은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므로 맥로글린의 주장을 통해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보자. 그들에 따르면 모든 감각상태 S의 유형에 대해, S=P인 물리적 상태 P의 유형이 존재한다.’라는 논제를 받아들일 경우 감각상태 S와 물리적 상태 P가 왜 서로 상관관계를 가지는지가 잘 설명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제를 주장하는 유형물리주의가 다른 이론에 비해 심신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 주니 이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재권 교수는 감각상태 S의 유형과 물리적 상태 P가 동일하다.’는 동일성 문장이 어떻게 둘 간의 상관관계를 잘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김재권 교수가 해석하는 유형물리주의자들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고통 = Cfa

고통이 발생한다 ↔ 고통이 발생한다. 

-----------------------------------------

∴ 고통이 방생한다 ↔ Cfa가 발생한다. 


힐과 맥로글린과 달리 유형물리주의가 심성에 관한 사실을 잘 설명해 주기에 이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은 블록
(Ned Block)과 스톨네이커(Robert Stalnaker)에 의해 주장된다. 이들은 어떤 두 현상간의 상관관계가 있음에 대한 주장(e.g. 심신이원론, 부수현상론)은 사실상 둘 간의 인과관계를 잘 설명해 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허균이라는 사람이 밥을 먹을 때, 교산이라는 사람이 밥을 먹고 허균이라는 사람이 시를 쓸 때 교산이라는 사람이 시를 쓰니 둘 간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고려한다고 해 보자. 이들의 상관관계 만으로는 허균의 행동이 교산의 행동에 어떤 원인이 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허균과 교산이 사실 같은 사람임을 안다면 이들의 행동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 단지 상관관계만 말하면 현상의 원인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나 동일성을 전제로 하면 하나의 정신 현상이 다른 정신적 현상의 원인이 됨을 잘 설명할 수 있으므로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상의 설명에로의 추론원리에 근거해 유형물리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의 힐과 맥로글린에 대한 김재권의 비판처럼 동일성 논제는 대입규칙으로서 작용할 뿐 실질적인 설명을 제시해 준다고 보기는 힘들다. 결국 다른 설득력있는 설명이 추가되지 않는 한 두 가지 유형물리주의의 입장 역시 지지하기 힘들어 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 ‘고통=Cfa’(동일성 논제) 고통이 발생한다. 고통이 발생한다.’로 부터 고통이 발생한다. Cfa가 발생한다.’를 이끌어 냄은 동일성 논제로 부터 대입규칙에 의해 고통 ‘Cfa’로 대체했을 뿐 둘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산은 현명하다.’ 교산=허균이라는 문장으로 부터 허균은 현명하다.’라는 문장을 얻을 수 있더라도 교산=허균이라는 문장이 교산이 현명함에 대해 설명하는가? 김재권 교수는 이러한 동일성 관계는 대입규칙에 지나지 않을 뿐 결과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또한 유형물리주의자들은 동일성 논제가 심신상관관계를 잘 설명해주니 이것이 심신문제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심신문제는 단순히 심신상관관계 뿐만 아니라 자기지식(self-knowledge)에 대한 인식적 특권성(epistemic privilege)이나 심적 속성의 다수 실현 가능성 그리고 감각질 전도의 가능성 등 설명되어야 할 다른 여러가지 문제를 포함한다. , 심신상관관계만을 잘 설명해 준다고 심신문제를 잘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7. 환원주의(Reductionism)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은 마음이 신체와 같은 일종의 실체(substance)로써 존재한다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비물리적 실체(nonphysical substance)가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은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기능주의의 도례와 더불어 마음이 실체는 아니나 우리 세계에 발생하는 인과력을 지닌 심적 상태(metal state)라는 입장이 제기되면서 그것이 실체는 아니더라도 속성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이 제기된다. 이들의 논쟁은 어떻게 정신적인 속성이 물리적 속성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느냐?’라는 물음으로 부터 시작되는데 환원주의자(reductionist)들 혹은 환원물리주의자(reductive physicalist)들은 정신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며 이 세계에는 어떠한 비물리적 속성(non-physical property)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반면 이러한 입장에 반대하는 비환원물리주의(non-reductive physicalism)는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전자를 속성 일원론(peoperty monism), 유형물리주의(type physicalism), 물리주의(physicalism) 등으로 부르며 후자를 속성이원론(property dualism)이라고 부른다. , 앞서 언급한 심신동일론과 유형물리주의는 환원주의적 입장으로 볼 수 있으며 기능주의는 비환원물리주의에 더 가까운 것이다.

 

심신동일론과 유형물리주의는 심적 유형(혹은 속성)과 물리적 유형(혹은 속성)이 전부 동일하다고 보는 총체적 환원주의(global reductionism)로 바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들은 하나의 심적 속성이 다수의 물리적 속성과 동일할 수 있다는 다수실현 논변에 부닥치게 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항하여 심신동일론을 살리려는 입장이 국지적 환원주의(local reductionism)였다. 총체적 환원주의는 고통이라는 심적 속성과 동일한 물리적 속성으로 인간이 지닌 신경섬유 이외의 다른 생명체가 지닌 신경섬유까지 고려해야 했었는데 국지적 환원주의는 그 종을 제한한 상황에서 하나의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을 동일시한다. 예를 들어 사람의 경우는 이지만 지렁이의 경우는 그리고 문어의 경우는 와 같이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국지적 환원주의는 다수실현논변이 제기하는 문제는 벗어나더라도 모든 단일한 심적 속성이 다양한 물리적 속성에 의해 실현가능하다.’라는 논제를 받아들일 경우 문제에 봉착한다. 즉 종 제한적으로 심적 속성이 다수 실현가능함을 받아들이더라도 같은 종 내에서 혹은 한 사람 내에서도 단일한 심적 속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 가능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보다 더 세부적인 제한을 두어 설명을 시도할 경우 심적 상태에 대한 보편적 설명이 사실상 불가능해 짐으로써 단일한 과학 프로젝트로서의 심리학이 불가능해 진다.

 

환원물리주의 이외에 비환원물리주의(non-physical reductionism)도 있다. 김재권의 수반물리주의(supervenience physicalism)가 바로 그것이다. 심신이원론이나 속성이원론이 설명하기 힘들었던 측면은 심적 속성이 어떻게 물리적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둘의 상관관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는데 김재권 교수는 이를 수반’(supervenience)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려 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의 속성은 그것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에 의존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 속성이 다르면서 아름다움의 속성이 같은 경우 혹은 물리적 속성이 같으면서 아름다움의 속성이 다른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아름다움의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김재권 교수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식별불가능함이 심리적으로도 식별불가능함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인과 관계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아래 그림을 보자.

 

 

위 그림과 같이 통증의 원인이 Cfa가 아니라 통증이 Cfa에 수반한다고 할 경우 물리적인 것이 어덯게 비물리적인 것의 원인이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을 피할 수 있다. 또한 인과관계는 물리적인 것들 사이에서 성립하며 비물리적인 관계 역시 수반적인 인과관계에 의해 원인과 결과 관계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수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 간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길이 열리는 것이다.

 

하지만 수반물리주의 역시 여러 비판에 직면한다. 우리는 어떤 심적 현상이 다른 심적 현상을 일으키는 경우를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고 이는 심적 속성이 다른 심적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수반물리주의에 따르면 어떤 심적 속성 $M_1$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M_1$이 수반하는 물리적 속성 $P_1$이 발생했기 마련임을 생각하게 된다. 즉 $M_1$이 다른 심적 속성 $M_2$의 원인으로써 역할을 하려면 $M_1$은 $M_2$를 예화하기 위해 발생하기 마련인 물리적 속성 $P_2$와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M_1$이 $P_2$의 원인이 되어 $P_2$를 발생시키고 $P_2$의 발생에 의해 이에 수반하는 $M_2$가 발생하는 방향에서 $M_1$이 $M_2$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 세계에서 어떤 물리적 사건의 원인은 반드시 물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물리 세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에 위배된다. 이는 $M_1$이 수반하는 $P_1$은 $P_2$의 원인이 될 수 있으나 $M_1$은 실질적으로 $M_2$의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되며 결과적으로 수반적 인과 모델은 심적 인과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수반물리주의는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이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아니더라도 수반 관계로 서로 상관관계가 있음을 설명함으로써 심적인 영역을 인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심적인 것의 독자적 지위는 전혀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수반론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물리적으로 식별불가능하더라도 환경이 다른 경우에는 심적으로 차이가 날 수 있다는 것과 물리적 속성이 다름에도 심적 속성이 같은 경우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시는 이른 바 심적 속성에 대한 왜재주의’(externalism)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을 통해 발견되는데 우선 속성에 관한 내재주의(internalism) 어떤 생명체가 속성 $\kappa$를 가지느냐의 여부는 그것의 본질적인(그것이 고유하게 가지는 내적인) 속성에만 수반한다.’는 입장이며 수반론자들은 기본적으로 이를 전제한다. 하지만 외재주의자는 어떤 생명체가 속성 $\kappa$를 가지냐의 여부가 그 생명체와 다른 대상 간의 관계 및 그 생명체가 처한 환경에 의존한다.’는 입장을 지닌다. 이제 두 종류의 반론을 살펴보자.

 

첫 번째 비판은 퍼트남(Hilary Putnam)의 쌍둥이 지구 논변으로 그는 물리적 속성이 다름에도 심적 속성이 같은 경우가 있을 수 있음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물의 분자 구조가 $H_2 O$인 지구 $E_1$과 물의 분자 구조가 $XYZ$인 것만 제외하고 적어도 외관상 모든 면에서 $E_1$과 같은 환경인 행성 $E_2$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때, $E_1$과 $E_2$의 각 행성에 살고 있는 물의 분자 구조에 대해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은 모두 이라는 단어를 통해 무색무취의 강과 바다를 채우는 것과 같은 동일한 심적 속성을 지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의 물리적 속성은 $E_1$과 $E_2$에서 각각 다르다. , $E_1$과 $E_2$에서 물은 그 물리적 속성에서 식별가능하지만 심적 속성은 두 사람 사이에서 식별불가능한 상황이 고려되니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하지 않는 관계가 고려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는 타일러 버지(Tyler Burge)의 비판인데 위와는 반대로 물리적으로 모든 면에서 식별불가능한 사람이 서로 다른 언어적 환경에 있음으로써 심적인 측면이 식별가능한 경우를 고려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간암에 걸렸다.’는 말을 가슴이 답답할 때 항상 쓸 수 있는 말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러한 사용이 언어 공동체 A에서 통용된다면 이 사람은 언어 공통체 A에서 참인 믿음을 지니게 된다. 하지만 나는 간암에 걸렸다.’의 의미가 언어 공통체 B에서는 암세포가 간에 퍼진 경우를 의미할 때 이 사람은 물리적으로 동일하더라도 언어 공통체 B에서 거짓인 믿음을 지니게 된다. 즉 물리적인면에서 식별불가능한 사람이 언어 공동체를 달리함에 따라 심적 내용(mental content)이 달라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예는 믿음과 같은 지향적 상태는 그 사람의 내적인 물리-심리적 상태에 수반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재권 교수는 이러한 비판에 직면하여 결국 환원주의로 방향을 수정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소개될 입장은 기능적 환원주의 인데 이는 기능주의와 유형물리주의를 결합시킨 입장으로 심적 상태의 기능적인 역할을 찾아 그것을 실현하는 물리적인 상태를 찾아 물리적인 상태에 의해 심적 상태를 설명함으로써 환원을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1단계로 심적 상태의 기능적 역할을 정의하고, 2단계로 1단계에서 정의된 기능적 역할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 확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2단계에서 찾은 물리적 상태를 통한 설명 이론 개발로 이루어진다. 김재권 교수는 이러한 방식이 현실적으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나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며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점차 설명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참고. 외재주의에 대한 반론: 자기 지식(self-knowledge)의 경우 인식적 특권성이 있는데 외부 환경이 어떻던 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다 거짓인데 외재주의의 논지는 자기 지시의 내용도 외부환경에 좌우되는 듯이 언급한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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