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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율뤼확

도덕적 회의주의 요약: 존 맥키와 프리드리히 니체

by 로짘 2020. 2. 5.

도덕적 회의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불필요한 논의를 줄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논제(thesis)를 부정하는 도덕적 회의주의의 유형에 대해서 논할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합리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한다.’

이 경우, 세 가지 유형의 도덕적 회의주의가 가능하다. 첫째로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있다. 둘째로, 도덕적 판단이 우리의 합리성이 아닌 주관적 감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덕적 규범은 지배 계층의 영속적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도덕적 규범에 대한 도구주의적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첫 번째 입장을 주장하는 철학자로는 존 맥기(John Mackie)가 있으며 두 번째 입장은 데이비드 흄(David Hume)과 에이어(A.J. Ayer)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입장은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를 고려할 수 있다.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은 이러한 도덕적 회의주의에 대비되는 입장으로 생각되어질 수 있다. 그는 윤리학이 선의지에 관한 탐구이며 의지의 자율(Autonomie)에 의해 행해진 행위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여겼다. 또한 선의지의 의지(Will)는 실천이성(혹은 실천적 합리성)으로써 우리 개개인의 일상적인 의무감과 관련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이익이나 성향 혹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닌 내적인 의무감으로부터 행해진 행위만이 도덕적이라고 불릴 수 있었고 무조건적으로 선한 선의지에 따른 행위일 수 있다고 여겼다. 칸트의 윤리학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먼저 그의 윤리학은 의지의 자율성을 통해 설명되며 이는 의지의 자유(Freiheit)를 전제한다. 또한 우리는 의지의 자율에 의해 행해진 무조건적으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기에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한다는 입장으로 이어진다. 도덕적 회의주의는 이 두 가지 특징에 비판적인 입장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1. 존 맥기(John Mackie)의 오류이론(Error Theory)

존 맥기의 도덕적 회의주의는 오류이론’(Error Theory)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그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 및 관습에 독립적인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실에 관한 진술이라고 할 수 있으나 도덕적 진술의 객관적 속성을 예화하는 사례가 존재하지 않기에 참일 수 없다(untrue)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옳고 그름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인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도덕적 회의주의를 주장한다. 그의 오류이론은 상대성으로 부터의 논증과 기이성으로 부터의 논증을 통해 지지된다.

 

먼저 상대성으로 부터의 논증(The argument from relativity)은 우리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도덕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한다. 맥기는 이러한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 다른 삶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부일처제에 대해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두 문화를 예로 들며 하나의 문화권에서 받아들이는 도덕적 사실(moral fact)이 다른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다시 말해, 모든 문화권의 모든 사람들이 준수하는 그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 대한 대표적인 대응은 도덕적 불일치가 일어나는 어떤 사례를 통해 모든 도덕적 판단에 대한 불일치가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임을 지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도덕적 판단의 불일치에 대한 사례가 존재한다고 해서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이론이 최선의 설명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기이성 논증(The argument from Queerness)은 형이상학적 진술과 인식론적 진술로 구성된다. 형이상학적 진술은 객관적인 도덕적 속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본질적으로 매우 특이한 종류의 속성에 대한 것임을 기술한다. 맥기는 객관적 도덕적 속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규정’(objective prescription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과 같은 정언적으로 명법적인 요소가 객관적으로 타당함’(any categorically imperative elements is objectively valid)을 고려하는데 여기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를 해라와 같이 어떤 조건하에서 특정 목적을 지니고 해야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명령이다. 맥기는 이러한 정언명법적 요소가 객관적으로 타당함은 이것이 제도나 관습(institution)과 같은 인간의 생각을 통하지 않은 마음에 독립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 느낌 그리고 태도 및 관습에 독립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객관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도덕적 속성 자체가 기이하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속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 우주에 있는 다른 속성에 대한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다.

 

다음은 인식론적 진술이다. 이는 앞서 언급한 기이한 객관적 도덕적 속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적 인식이나 직관에 대한 특수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다른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의 능력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리해서 객관적인 도덕적 속성은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속성들과 달리 매우 기이한 것이기에 그것들에 대해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이한 능력을 지녀야 하나 그러한 능력이 없을 것이므로 객관적인 도덕적 참 혹은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고. 공리주의 역시 보편적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유사한 회의주의에 포함된다.

 

2. 데이비스 흄과 에이어의 정서주의 (David Hume and A.J. Ayer's Emotivism)

또 다른 방식의 도덕적 회의주의는 도덕적 판단이 우리의 합리성이 아닌 주관적 감성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도덕적 판단은 사실에 대한 판단이 아니며 또한 우리의 합리성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특정 행위에 대한 행위자의 시인과 부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1) 에이어의(A.J. Ayer) 정서주의

 

정서주의에 따르면 도덕적 판단은 객관적인 실재인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라 행위자가 느낀 감정적 동의를 표현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과 태도에 동조할 것을 권유하는 것이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은 진리값을 지니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을 지닌 정서주의자로는 에이어(A.J. Ayer)가 있다.

 

에이어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진술이 검증원리에 의해 그 진리값을 알 수 없는 진술이므로 인지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도덕적 판단에 관한 진술은 단지 감정의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에이어는 논리실증주의자였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은 문장이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그것이 검증가능할 경우라고 여겼다. 그래서 인지적으로 유의미한 문장은 첫째로, 동어반복적인 문장 혹은 정의에 의해 참인 진술이다. 그리고 둘째로, 경험적으로 검증 가능한 진술이 인지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여겼다. 그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진술은 검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덕적 문장은 인지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고 여겼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그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진술이 사실에 관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정서주의를 주장한다. 그는 감정의 보고와 감정의 표현을 구별하는데 ‘X는 선이다라는 문장에 대한 감정의 보고는 나는 X에 관해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와 같은 것이며 이는 참 혹은 거짓의 진리값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의 표현은 ‘X 만세와 같은 것으로 감정의 표현에는 참 혹은 거짓의 진리값을 부여할 수 있는 사실에 관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에이어는 도덕적 판단에 관한 진술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에이어의 정서주의는 기본적으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검증원리가 명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으며 도덕은 주관적인 감정 표현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고려되는데 그의 정서주의는 도덕을 보편적이지 않은 주관적인 정서적 표현으로 환원하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 받기도 한다.

 

참고. 도덕적 판단이 우리의 합리성에 의해 제시된다는 입장을 부정하는 입장이라면 자연주의도 유사한 회의주의에 들어갈 수 있다.

 

(2) 데이비드 흄(David Hume)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도덕적 판단과 도덕적 동기부여력은 정념으로부터 도출된다고 여겼다.

먼저 흄은 도덕적 판단이 이성이 아니라 주관적 감성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그는 근본적으로 도덕적 진술이 진리값을 지닌다고 여기지 않았다. 예컨대 고의적 살인은 악이다라는 진술은 행위 그 자체의 성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바라 볼 때 생기는 우리의 감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여긴다. , 여기서의 선과 악이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행위나 인격 자체 안에 있는 요소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 자신의 시인 혹은 부인의 감정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도덕성은 판단되기보다 느껴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

 

또한 흄은 도덕적 행위의 동기는 이성이 아니라 감성이라고 여겼다. 흄에 따르면, 이성이 논증적 지식이나 명제에 관련된 것이기에 이것이 유용하지만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고 여겼다. 말하자면, 이성은 어떤 사실을 확인할 뿐, 칭찬이나 비난을 통해 어떤 것을 지시하지는 못하므로 행위를 이끄는 동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한 음식을 먹는 것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는 지식 때문에 우리는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여긴다. 하지만 흄은 어떤 사건이 다른 사건을 일으킴을 안다는 사실이 행위의 동기를 부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때 우리가 상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상한 음식을 먹음으로써 우리가 고통을 겪에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고통에 대한 혐오나 쾌락이 대한 집착 등이 우리의 의지에 영향을 줌으로써 행위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감정에 의해 설정된 목적 그 자체와 관련되지 않고, 오직 그 목적의 실현을 위한 수단과 관련될 뿐이다. 이 점에서 이성은 정념의 노예가 된다는 것이다.

 

3.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적 규범은 지배 계층의 영속적인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는 도덕적 규범에 대한 도구주의적 입장이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과 유사한 입장으로 니체의 도덕비판을 고려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니체는 (1) 자유의지를 특정 지배계층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로 고려해 이를 허구라고 여기며 (2) 우리 인간이 지닌 실천이성(혹은 합리성)을 통해 도덕을 설명하는 것을 부정하고 (3) 보편적 도덕이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의 입장은 우리의 실천이성에 근거한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함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도덕적 회의주의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판단의 기준과 도덕적 행위의 동기부여력을 고려할 때, 칸트주의적 입장의 대답은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실천이성(합리성)을 기반으로 우리의 의지의 자율(Autonomie)에 의해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제시하고 그것이 우리의 의지의 자유(Freiheit)가 전제된 의지의 자율에 의해 제시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동기부여력을 지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우리의 실천이성을 통해 경험세계에 독립적인 도덕적 판단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니체의 도덕 비판론은 이렇게 철저하게 이성 중심적이며 경험세계에 초월적인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니체가 직접적으로 칸트와의 비교를 통해 그의 도덕적 회의주의를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칸트주의적 입장과의 비교를 통해 알아 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니체는 다음의 세 가지 지점을 비판한다.

 

첫째로, 니체는 자유의지가 신학자들과 같은 특정 지배계층의 영속적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주장하며 그렇기에 자유의지는 허구라고 주장한다. 칸트주의적 입장을 따르자면 보편적인 도덕률은 의지의 자율에 의해서 제시되며 여기서 의지의 자율은 실천이성에 근거하여 스스로 도덕법칙을 형성하고 이에 따라 행위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자율성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의지가 자유로워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지가 자유로워야지만 스스로 법칙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지의 자유는 도덕 법칙의 성립근거이며 도덕 법칙은 의지의 자유에 대한 인식 근거가 된다. 하지만 니체는 인간의 죄에 대한 책임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로써 자유의지를 고안했다고 말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행위를 했음이 우리의 의지에 의함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 행위를 그만둘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면 그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니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책임의 문제와 연결시켜 죄의 문제와 결부시킨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지니고 행동함으로써 그 행위에 책임이 있고 또한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심판 받고 벌 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자유롭다고 생각하게 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자유의지자유가 인간이 지닌 경향성이나 욕구, 충동, 감정 등의 자연적 속성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자기 원인적이지 않으며 이러한 자연적 속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여긴다.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그의 두 번째 비판인 자유의지 혹은 실천이성과 같은 합리성에 의해 도덕적 판단과 가치 평가가 제시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둘째로, 니체는 도덕적 판단과 가치 평가가 실천이성(혹은 합리성)에 의해 제시되기보다 이를 생리학적 문제로 고려했다. 그는 인간이 지닌 성향인 욕구, 충동, 감정 등을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여겼고 이를 자연적 사실로 여겼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는 욕구나 충동에 의해 일어나며 이에 대한 평가를 통해 설명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충동 없이는 어떠한 선한 행위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도덕적 행위라는 것은 충동(Trieb)의 극복과 관련된 문제라고 여겼기에 도덕적임은 충동을 극복하는 것이라고 고려했다. 다시 말해, 그는 합리성이 아닌 우리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사실인 욕구와 충동을 통해 도덕적 행위를 설명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경험세계(자연)에 독립적인 객관적인 도덕적 판단 기준이 존재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니체는 욕구와 충동과 같은 인간의 자연적 성향 자체는 선·악이 없는 가치중립적인 요소라고 고려했는데 이러한 자연적 성향에 따른 인간의 행위와 동기 및 결과는 역사적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고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고려했다. 그렇기에 니체는 실질적인 도덕에 대한 탐구는 계보학적인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여겼다. 그의 <도덕의 계보> 전편인 <선악의 저편>에서는 도덕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노예의 도덕이고 다른 하나는 주인의 도덕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핍박 받는 자신의 삶을 잘못된 것으로 바라보고, 주인이 행복하게 삶을 즐기는 것을 으로 바라본다. 반면 주인은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노예와 거리를 두고 노예와 관련된 것을 경멸하고 사악하다고 여긴다. , 노예와 주인은 서로 다른 도덕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니체는 고귀하고 강력한 것을 좋은 것으로, 비열하고 무력한 것을 나쁜 것으로 평가하던 귀족의 가치를 정 반대로 바꾸어놓은 것이 기독교라고 말한다. 기독교는 고귀한 것을 나쁜 것으로, 평범한 것을 선한 것으로 평가하는 가치를 전복시킨 노예의 도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노예의 도덕과 주인의 도덕이 지니는 차이는 모든 역사적 상황이나 시대에 그리고 집단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적 가치가 있음을 부정할 근거로 제시된다.

 

이렇게 니체는 도덕이 진리처럼 어떤 절대적 신으로부터 파생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영역에 속해있다고 여긴다. 그는 도덕이 한 개인 속에 존재하는 여러 충동들 가운데 한 충동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또한 그는 충동에 의해 지배되는 도덕은 보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도덕은 어떤 현상들에 대한 잘못된 의미부여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니체가 자유의지를 지배계층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도구로 바라보았듯이 니체의 도덕에 대한 위와 같은 입장을 도덕규범에 대한 도구주의적인 해석으로 바라 볼 경우, ‘도덕의 이데올로기적 사용과 도덕적 합리성의 개념을 동일시하는 오류가 있다고 비판 받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한 집단 혹은 개인이 지니는 도덕규범에 관한 믿음이 어떠한 역할을 하느냐 마느냐는 윤리학(혹은 규범윤리학)의 대상이기 보다 사회학적 분석의 대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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