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윤리학이 지닌 주요한 물음 중의 하나는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무엇이냐이다. 만약 어떤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 기준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기준은 보편적 기준인가 아니면 상대적 기준인가? 이러한 물음에는 세 가지 대답이 존재한다. 도덕적 절대주의(moral absolutism)는 단일한(혹은 유일한) 보편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회의주의(nihilism)는 그러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마지막으로 상대주의(relativism)은 그러한 기준이 사람들이나 집단 혹은 행위를 판단하는 상황에 의존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 도덕적 절대주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보편적인 기준(혹은 사실)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기준에 따른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에 대한 판단이 어떠한 사람들에 의해 혹은 어떠한 집단에서 이루어지던 동일하다.
- 도덕적 상대주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상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 기준에 따른 행위의 옳고 그름은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 채택된 표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
- 도덕적 회의주의: 행위의 옳고 그름에 관한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 여러 도덕적 회의주의에 대한 입장은 여기를 참고하세요.)
도덕적 절대주의를 따르는 입장으로 임마뉴엘 칸트를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윤리학을 선의지에 관한 탐구로 이해했고 오직 의지의 자율에 의해 행해진 행위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에게 선의지는 어떤 목표의 추구 및 달성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으로서 선한 것이 아닌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 ‘선의지’는 도덕적인 원칙에 따라 행위하는 실천이성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보편적 행위의 준칙을 따른 의무의 동기로부터 행위하는 것(act from the motive of duty)이었다. 그는 어떤 행위가 진정한 도덕적 가치(genuine moral worth)를 지닌다는 것은 곧 그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가능하다(universalizable)는 것으로 여겼다. 다시 말해, 어떤 행위의 준칙이 보편화가능하지 않다면 그 준칙에 따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동정심에 의해 다른 사람을 도왔다고 해보자. 이 사람의 “다른 사람을 도운 준칙”은 “행위자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다”는 준칙을 지닐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욕구를 지닌 행위를 할 수도 있으며 이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를 따르라는 준칙은 보편화 가능하지 않고 그렇기에 욕구를 따르라는 준칙을 따른 행위는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칸트는 내적 의무감의 근거에 놓여있는 실천 법칙을 ‘명법’(Imperativ)이라고 불렀으며 이를 정언명법과 가언 명법으로 구별했다. 정언 명법은 행위의 수행이 곧 목표 자체임을 나타내는 형식으로 그 자체로서의 선을 표현하는 것이며 가언 명법은 어떤 다른 목표를 추구하여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선을 명령하는 명법이라고 설명한다. 칸트는 정언 명법에 속하는 실천 원리를 ‘도덕성의 명법’이라고 고려한다. 그래서 정언 명법에 속하는 도덕성의 명법은 정의상 어떤 목표나 의도의 제약도 받지 않으며 행위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고 행위 자체를 직접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그는 ‘너의 준칙이 보편 법칙이 될 것을 그 준칙을 통하여 네가 동시에 의욕할 수 있는 그러한 준칙에 따라서만 행위하라.’고 말하며 이는 한 개인이 선택한 도덕 규칙으로서의 준칙(Maxime)이 보편화 가능해야만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이렇게 칸트는 우리의 자율적 의무감에 근거한 도덕 법칙을 정언 명법에 속하는 것이자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하며 그 자체가 목적인 그러한 준칙의 제시를 시도한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기준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 그의 도덕에 관한 입장은 도덕적 절대주의로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 회의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는 존 맥기(John Mackie)를 고려할 수 있다. 맥기의 오류이론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 및 관습에 독립적인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는 우리가 옳음과 그름의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지 어떤 객관적인 개념을 발견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며 도덕적 회의주의를 지지한다. 그의 도덕적 오류 이론은 두 가지 논증에 의해 지지된다. 먼저 맥기는 상대성 논증을 통해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하고 기이성 논증을 통해 도덕적 회의주의를 지지한다.
- 상대성 논증(The argument from relativity): 상대성 논증은 우리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도덕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로써부터 시작된다. 맥기는 이러한 현상이 보여주는 것은 서로 다른 삶에 따라 사람들은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일부일처제에 대해 서로 다른 도덕적 판단을 하는 두 문화를 예로 들며 하나의 문화권에서 받아들이는 도덕적 참(moral fact)이 다른 문화에서 받아들일 수 있느냐고 묻는다. 다시 말해, 모든 문화권의 모든 사람들이 준수하는 그러한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도덕적 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 기이성 논증(The argument from Queerness): 기이성 논증은 형이상학적 진술과 인식론적 진술을 지닌다. 형이상학적 진술은 객관적인 도덕적 속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본질적으로 매우 특이한 종류의 속성에 대한 것이라고 기술한다. 그는 도덕적 속성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규정’(objective prescriptions)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법(categorical imperative)과 같은 ‘정언적으로 명법적인 요소가 객관적임’(any categorically imperative elements is objectively valid)을 고려하는데 여기서 칸트의 정언명법은 ‘ 를 해라’와 같이 어떤 조건하에서 특정 목적을 지니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명령이다. 맥기는 이러한 정언명법적 요소가 ‘객관적으로 타당함’은 이것이 제도나 관습(institution)과 같은 인간의 생각을 통하지 않은 마음에 독립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 느낌 그리고 태도 및 관습에 독립적으로 주어진 그러한 객관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지는 도덕적 속성 자체가 기이하다고 여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속성에 대한 이해는 우리 우주에 있는 다른 속성에 대한 이해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에 대한 이해라는 것이다. 인식론적 진술은 이러한 기이한 객관적 도덕적 속성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도덕적 인식이나 직관에 대한 특수한 능력을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능력은 다른 대상들을 인식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의 능력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리해서 객관적인 도덕적 속성은 우리 세계에 존재하는 다른 속성들과 달리 매우 기이한 것이기에 그것들에 대해 인식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이한 능력을 지녀야 하나 그러한 능력이 없을 것이므로 객관적인 도덕적 참 혹은 속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증이다.
이러한 논증에 대한 대표적인 대응은 도덕적 불일치가 생각보다 그렇게 광범위하게 발생하지는 않으며 깊은 수준의 광범위한 도덕적 일치가 존재함이 이러한 불일치에 의해 간과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현상에 대한 최선의 설명이 객관적인 도덕적 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류이론이라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대응의 한 방식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지지하는 것이다. 도덕 상대주의는 모든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궁극적이며 실질적인 단일한 도덕 기준들(a single set of ultimate substantive moral standards)이 존재한다는 것은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규범적인 관점(a single normative perspective)을 지닐 수 있다고 인정한다. 다시 말해, 도덕 상대주의는 모든 것인 상대주의적임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상대주의적이라면 ‘모든 것이 상대주의적이다’라는 주장 자체는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모순에 빠지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 상대주의는 단일한 규범적인 관점을 지니기에 이러한 비판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즉, 상대적인 하나 이상의 도덕의 기준을 지닐 수는 있지만 이들은 단일한 규범적인 관점에서 어떤 상황에 올바른 도덕 기준인지가 일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 스캔론의 계약주의를 도덕적 상대주의의 한 예라고는 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약주의는 상대주의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상대주의가 지닐 수 있는 모순 문제를 지니지 않는 장점이 있다. 그는 그의 입장을 ‘파라메트릭 보편주의’(parametric universalism)라고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보편적인 원칙에 근거해서 옳고 그름이 판단될 수 있지만 이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의 그름에 대한 정식은 다음과 같다.
- 스캔론의 정식(Scanlon's formula): 행위 A가 그르다 iff A가 행해진 상황에서 그 행위가 누구에 의해서도 합당하게 거절될 수 없는 원칙들의 임의의 집합에 의해 허용되지 않을 경우이다. 이때의 원칙은 행위에 대한 보편적 규정으로써 잘 알려지고(informed) 자발적이며(unforced) 일반적인 동의를 얻은 것이다.
스캔론의 정식은 행위의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 정식을 제시한다. 다시 말해, 이는 단일한 규범적인 관점을 지닌다. 하지만 여기서 합당하게 거절될 수 없는 원칙은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여기서 ‘원칙’이라는 것은 이유들의 집합으로 고려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원칙은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이유들을 모은 것이며 이러한 이유들의 귀결이 원칙이 된다는 것이다. 이 이유는 스캔론의 용어로 ‘통상적 이유’(generic reason)로 행위자의 복리 증진, 편애성, 공정성 등이 그 근거가 될 수 있으며 주어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지니게 될 이유를 말한다. 그의 입장은 ‘이유근본주의’(Reason fundamentalism)라고도 불리우는데 이는 그가 이유를 통해 행위을 옳고 그름을 설명하길 원하며 이 이유가 비규범적 용어로는 환원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어진 상황이 같을 경우 사람들은 어떤 행위에 대해 통상적 이유를 지니고 이를 옳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나 주어진 상황이 다를 경우 사람들은 이 행위를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스캔론의 계약주의는 상대주의적 성격을 띄면서도 단일한 규범적 관점을 지니는 일관적인 입장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스캔런은 이를 ‘관행의 원칙’(Principle of Established Preactice)을 통해서 소개한다. 관행의 원칙에 따르면 공동체 내에서 거부할 수 없는 원칙이 수용되고 있을 때, 한 개인이 단지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그 원칙을 어기는 것은 그르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생활의 존중을 고려할 때, 개인은 자신이 허가한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침해받지 않으면서 삶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생활’과 관련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에 대한 경계를 규정하는 방법이나 의사소통에 관한 방법은 각 사회마다 다를 수 있다. 따라서 관행의 원칙은 각 사회마다 다르게 적용될 수 있지만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 원칙이 금지하는 방식에 따라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일은 그른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이렇게 계약주의는 스캔런의 정식을 통해 상대주의가 지니는 장점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스캔런은 상대주의가 행위자의 이유를 무시하기에 사람에 대한 존중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만약 상대주의자가 사생활 침해의 사례에서 어떤 사회에서는 사생활 혹은 개인적인 자유에 대해 가치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사회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그르다고 할 수 없다고 말을 한다면 이러한 상대주의자는 그 사회 속의 행위자들이 그렇게 대우받지 않기를 원하는 이유를 무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행위자의 이유를 무시하기에 사람에 대한 존중을 결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스캔런은 계약주의의 틀 안에서 상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삶의 방식’ 혹은 ‘사회적 관습’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춰락 > 율뤼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리주의와 비판 및 물음들 (0) | 2020.02.06 |
---|---|
도덕적 회의주의 요약: 존 맥키와 프리드리히 니체 (0) | 2020.02.05 |
토마스 스캔런(Thomas Scanlon)의 계약주의 요약 (0) | 2020.01.27 |
칸트의 의무론적 윤리설에 대해 (0) | 2020.01.25 |
토마스 네이글의 행위자 상대적 이유와 의무론의 역설 (0) | 2020.01.2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