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포스팅에서는 가다머의 주요 개념을 정리해 봅니다.
1. 선입견(Vorurteil)
가다머에게 선입견이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역사적 탐구를 행할 때 처하게 되는 고유한 존재론적 상황이다. 선입견은 인간적 존재자의 근원적인 역사상, 역사적 존재자로서의 승인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흔히 선입견하면 먼저 떠올리는 것은 판단하는 주관의 고유한 기호나 선호 내지는 편향성이고 이런 주관적, 사적 요인들이 판단에 영향을 주어 사태(Sache)를 사태 그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부정적 상황이다. 그러나 가다머에 따르면 선입견에 대한 이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원래의 개념사를 살펴보았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가다머에 따르면 Vor-urteil 이나 영어의 Pre-judice 모두 앞선-판단이라는 의미, 즉 일종의 예비적 판단 또는 판단의 준비과정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관의 왜곡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것은 계몽주의의 낙관적 이성관에 의한 것이다. Vorurteil 이라는 단어에는 Vor와 Urteil이라는 두 단어가 들어있다. Vor란 우리의 인식 능력을 ‘미리’ 제한하는 요소들이다. 이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태도는 미리 주어진 것을 이성을 사용하여 적극적, 자발적으로 장악, 통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요구되었던 하나의 전제가 이성에 대한 신뢰인데, 바로 이 부분에서 가다머의 비판이 이루어진다. 가다머에 따르면 이런 이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인간이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선입견을 불신하는 계몽주의자와 선입견의 복권을 꾀하는 해석학자(가다머) 사이에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상이한 견해가 놓여있다. 즉 ‘이성에 대한 전폭적 신뢰’ 또는 ‘이성 자체의 역사성에 대한 승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때 중요한 것은 문제의 기저에 진리 문제가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선입견의 Vor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Urteil을 이야기 해야한다. Urteil개념의 철학사적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Logos apophantikos, 즉 진리의 장소이다. 이에 대해 계몽주의자들은 선입견이 실제의 판단에 앞서서, 판단을 왜곡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거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이때의 진리란 판단의 진리로서 근원적 진리의 한 파생적 양태이다. 왜냐하면 근원적 진리란 대화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판단의 진리란, 언어의 대화적 성격을 사물과의 일치라는 관점에 입각해서 제거해나가는 추상화의 과정을 통해 나타난 결손적 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가다버의 입장이다. 가다머는 대화의 진리를 위해 선입견의 복권을 시도한다. 대화의 진리란 달리 생각하는 일자와 타자가 만나 그들의 지평이 융합되면서 하게 되는 경험으로, 이때 선입견을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대화에 임하는 자는 언제나 자신의 입장에서, 즉 선입견을 가지고 말하고 듣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화를 통해서 서로 다른 두 선입견의 융합이 일어나는 경우, 우리는 대화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얻지 못했을 진리를 얻게 된다. 이러한 대화의 진리야말로 진리의 근원적 형식이다. 따라서 판단과 사태의 일치라는 판단의 진리는 대화의 진리의 한 파생적 양태인 것이다.
결국 판단의 진리를 위해 선입견을 제거하려는 계몽주의자들의 시도는 파생적 진리의 보장을 위해 근원적 진리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계기(선입견)을 제거하려는 도착된 시도이므로, 가다머에게 선입견의 불신은 극복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요컨대, 선입견이란 제거의 대상이 아닌, 인간적 존재자의 근원적 역사성이다.
2. 시간간격(Zeitenabstand)과 사태(Sache)
시간간격은 해석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해석학적 문제로서 시간간격은 우리 인간적 현존재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과거의 어떤 사람들의 삶과의 만남이라는 근원적 경험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험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사유하고, 다른 가치관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조건과 다른 조건을 살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이다.
가다머는 이전의 객관주의적 해석학의 전통에 서있던 딜타이와 달리, 이해를 일방적 과정이 아닌 상호적 과정으로 그리고 그 이해의 과정은 완성에 이를 수 없고 끊임없이 형성중이고 운동하고 확장하는 과정을 보았으며 사태 자체 역시 고정된 것으로서 옳은 이해와 그릇된 이해 혹은 참된 선입견과 그릇된 선입견을 구분해주는 기준이 아니라 지속적인 형성의 과정에 잇는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가다머의 경우, 시간적 거리는 극복해야 할 것이 아닌,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이해의 가능성으로 작용한다. 시간적 거리는 관습과 전통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러한 조명을 받으며 전승은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적 거리는 텍스트나 예술작품에 포함된 참된 의미를 걸러낸다. 이렇게 여과작업을 수행하는 시간적 거리는 끊임없는 운동과 확장의 과정중에 있다. 이러한 시간적 거리를 통해서만 그릇된 선입견을 통해서만 그릇된 선입견에서 올바른 선입견을 구별해 내는 해석학의 비판 작용을 수행할 수 있다.
가다머에게 Sache란 하나의 고정된 사실이 아니라 바로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저자가 말하고 있는 것과는 엄격히 구분된다. 우리는 일반적인 대화 상황에서 고정된 하나의 사태에 대해 상호간에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A에게 해석된 사태와 B에게 해석된 사태간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 다시 새로운 사태가 나온다. 이러한 것을 텍스트에 적용시켜보면, 하나의 해석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 텍스트는 후대에 이미 이루어진 해석과 함께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은 원래의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 해석된 텍스트로 다가오고 이에 대해 해석자는 자신의 해석을 가하여 응수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이해는 원 텍스트와 해석자간의 지평융합이 아니라 이미 해석된 텍스트와 그것에 대한 해석으로서의 해석자간의 지평융합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순환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형식논리적 순환이 아니라 나선형 순환이며, 실제로 Sache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즉 고정된 사실로서의 Sache가 이 순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순환적 규정과정을 통해서 Sache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호적 규정과 대화를 통해 Sache를 형성하는 것이 가다머의 ‘이해’이다.
3. 영향작용사의 원리(das Prinzip der Wirkungsgeschichte)와 지평융합(Horzonverschmelzung)
딜타이는 시간간격에 의해서 발생한 의미소외가 이해의 모델을 통해 극복 가능하고, 그러한 이해의 가능성으로서 객관정신(objektiver Geist)를 제시한다. 그러나 가다머는 이러한 딜타이의 입장을 역사객관주의 또는 역사적 계몽주의라고 비판하며 다른 해석학적 입장을 제시한다. 이는 바로 지평융합의 모델이다.
과거로부터 전수된 것은 명백히 과거의 지평에 속하는 것이고, 그 지평과 내가 속해있는 지평간에도 분명 시간간격이 놓여있다. 가다머는 딜타이가 이 시간간격을 객관정신에 근거한 이해모델을 통해 완벽히 제거하고 사실을 복원할 수 있다는 입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다머에 따르면, 역사적 전승은 죽은 기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고 그것도 지속적으로 작용하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고정된 대상으로서의 과거의 체험내용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과거로부터의 전승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전승,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작용하고 우리에게 부단히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적인 상대자이며, 우리 역시 전승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반대 영향을 가한다. 즉 과거의 Wirkung에 대해 우리는 Rückwirkung으로 응수한다. 이러한 전승의 Wirkung과 Rückwirkung, 전승의 물음과 우리의 답변, 작용하는 물음과 반작용하는 답변간의 영향을 미치는 현실적인 관계 전체를 가다머는 영향작용사(Wirkungsgechichte)라고 부른다.
영향작용사는 유한한 존재자에 작용하는 역사이면서 동시에 유한한 존재자가 작용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이 상호적 관계의 유지를 통해서 형성되는 하나의 역사, 즉 작용하는 역사와 반작용하는 자유로운 해석자 간의 상호적으로 긴장되는 관계이다. 이때 추구되는 것은 무한한 대화의 전개이다. 이 무한한 대화를 통해서 나와 역사가 서로 매개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동시에 자기 매개의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가다머에게서 이해란, 유한한 인간에 작용하는 과거의 지평과 자신의 측에서 다시 역사에 역작용하는 현재 지평의 상호적인 융합의 무한한 과정이다.
그런데 일단 작용하는 과거의 지평과 이에 자신의 측에서 반작용하는 현재의 지평이 융합되기는 하지만, 과거 지평 자체나 현재 지평 자체와 같은 것은 없다. 즉 닫힌 지평, 그 자체 고정된 지평은 다만 하나의 추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모든 지평은 지속적인 운동과 형성 중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자체로서 폐쇄된 지평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작위적인 방법론적 절차일 뿐이다. 과거의 지평이 실제로 있고 거기에 대립된 현재의 지평이 있어서 둘이 나중에 융합된다는 것은 완벽한 오해이다. 다만 잠정적으로만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즉 실제로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늘 다른 지평에 대해서만 있고, 지속적으로 형성될 뿐인 그래서 우리가 방법론적으로 과거의 지평에 주목하고 부각시켜 따로 떼어내는 추상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평임을 주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해석학적 상황(우리가 이해해야 할 전승과 직면해서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고 이것은 유한한 인간의, 즉 역사적 존재의 본질에서 기인한다)은우리가 수반하고 있는 선입견을 통해 규정된다. 이렇게 선입견은 현재의 지평을 형성하게 한다. 따라서 이해란 지평들간의 융합의 과정이다. 이해가 자기를 실현시켜 가는 중에 진정한 지평융합이 일어난다. 이러한 지평융합의 규제된 수행을 영향사적 의식의 과제라고 한다. 다시 말해 영향사적 의식의 과제란 지평융합의 수행이다.
4. 권위와 전통(Autorität und Tradition)
권위와 전통은 und 라는 접속사로 병치될 수 있는 개념들은 아니다. 오히려 전통의 권위가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는 선입견을 귄위에 의한 선엽견과 속단에 의한 선입견으로 구분지었다. 속단이란 이성이 잘못 사용된 경우이고 권위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이렇게 계몽주의는 이성과 권위를 배타적으로 위치시킨다. 슐라이어마허도 계몽주의를 좇아 선입견을 지속적인 선입견과 일시적인 선입견으로 구분하여, 참일 수도 있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러나 권위는 중성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타파하거나 복권할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의 권위인가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가 전통과 권위라고 할 때, 이 두 개념은 동렬의 개념이 아니라, 실은 전통의 권위를 점을 앞서 밝혔다. 가다머가 복권하고자 하는 권위는 전통의 권위, 존재의 권위, 정확히 말하자면 역사의 경험에서 우리에게 이해되어지는 존재로서의 전통의 권위이다.
전통에게는 그 타당성을 위해 전통을 긍정하고, 채택하고 손질하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전통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유지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역사적인 변화 속에 작용하는 유지라는 점이다. 즉, 변화에 대한 단적인 거부가 아니라, 변화를 통한 그리고 변화에도 불구하고 발견되는 유지이다. 따라서 이 전통의 연속성이 단적인 동일성이 아니라, 타자를 매개로한 반성된 동일성이자 변증법적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 안에 서 있다. 이것은 공간적인 ‘안’이 아니라 ‘거주’의 의미를 갖기 때문에 대상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전통은 이론적 관찰과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마치 하이데거의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안에 있음이다. 따라서 권위 있는 전통과 우리의 만남은 외적 반성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하나의 자기 재인식이다. 여기서 자기 인식은 하나의 인식이 아니라, 자기화 하는 동화이다. 가다머에게 자기인식의 의미는 항상 타자를 통한 자기 발견이므로, 정리해보자면 권위있는 전통과의 만남은 자기화하는 동화로서의 자기재인식이다.
역사적 경험은 전승(Überlieferung)과 나의 상호적 매개의 경험이다. 연속성을 주장하는 전승과 그때그때마다 전승을 나의 시각에서 달리 이해하는(anders verstehendes) 나의 대화이고, 이 대화를 통해 전승도 달라지고, 나도 달라진다. 여기에서 다름(Differenz)는 동일성에 대한 다름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것과 동일한 것의 동일성으로서 동일성 안에서 다름이다.
가다머에게 역사의 연속성은 분명히 변증법적인 개념이기에 그가 ‘역사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역사에 속한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이 문장을 역사와 우리 존재자의 상호귀속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변증법의 미시적 차원에서 보면 역사와 우리는 테제와 안티테제로 서로에게 귀속하며, 이 차원에서 옛 것에 대한 새로운 것의 지위는 항상 보장된다. 가다머는 이를 '적용(application)'이라고 하기도 하고 다른 이해(Andersverstehen)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변증법의 거시적 차원에서는 분명히 우리가 역사에 속한다. 가다머가 말하는 전통의 지배, 옛 것의 우위, 또는 역사의 연속성이란 바로 이 거시적 차원의 서술을 말한다. 즉 상호 귀속하는 전승과 우리가 함께 유입되는 하나의 고유한 그리고 공통의 세계이다. 이 세계 그리고 거대한 변증법의 자기 동일성은 동일성과 차이의 매개의 산물이다.
이와 같은 진정한 전통의 권위를 복권할 때, 해석학적 문제의 출발점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언어와 존재(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
가다머는 자신의 주저 『진리와 방법』에서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다(Sein, das verstanden werden kann, ist Sprache)"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철학적 해석학의 근본 명제로 알려져왔으나 아직 그 의미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명제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오류중에 하나는 언어와 존재간의 무조건적 동일시이다. 그리고 두 번째 오류는 언어와 존재의 동일성으로부터 언어의 절대성을 도출하고, 이를 근거로 언어를 절대적 형이상학적 실체로 해석하는 것이다.
인간적 존재자의 존재 이해는 근본적으로 한 특정 언어의 의미론적 구조 위에 정초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존재, 우리에게 보여진 존재의 의미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부룩하고 우리는 이 언어적으로 분절된 존재의 의미를 존재로 간주할 충분히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 언어적으로만 사고할 수 있는 존재자에게 언어적 표현 이전의 존재 자체는 언표될 소도 사유될 수도 없으며, 그런 한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러한 의미에서만 가다머는 ‘모든 것은 언어다’라고 쓴다.
해석학적 근본 명저의 주어(존재)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이해 가능한 언어적 의미, ‘언어적으로 해석된 존재’다. 이와 같이 존재는 이해하는 존재자가 사용하고 있는 바로 그 언어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존재며, 그런 한에서만 언어와 동일시 될 수 있다.
언어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적 사고 속에서 존재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내지는 존재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것, 즉 존재의 대행자 같은 것이다. 존재가 언어 속에 현존한다고 여겨지는 ‘한에서만’, 언어는 존재를 대행할 수 있다. 언어의 현존성은 이처럼 조건부로만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 속에 이미 언어는 결코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물론 가다머 또한 언어를 우리가 그 배면으로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최후의 심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규정으로서 가다머가 읨하는 것은 언어 자체의 절대성이 아니라 인간적 사고의 절대적 언어 구속성이다. 이는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유한하고도 역사적인 본성이 이해하고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는 모든 제한적 제약들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의미에서의 절대자가 아니라, 도리어 이 잡다한 제약 위에 존립하는 역사적으로 규정된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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