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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와 말의 유비

by 로짘 2020. 2. 11.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카톨릭 신앙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이기에 의심될 수 없는 기독교적인 믿음 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인간의 정신이 동물과 구별되는 이성적 영혼이라는 측면에서 신의 정신과 유사한 지점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신은 창조하며 인간은 창조되었기 때문에 신이 인간 보다 더 우월하다고 고려한다. 인간 보다 우월한 신을 인간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를 물을 때, 그는 믿음은 신을 추구(seek)하고 이해는 신을 찾으므로(find) 신을 이해하려면 신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삼위일체설에 대해 알기 전에 신과 인간에 대한 그의 생각을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자.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신은 인간과 구별되지만 유사점이 있다. 먼저 인간의 정신과 신의 정신이 지닌 차이와 유사점을 알아보자. 그는 우리 육체의 경우 삼위일체를 찾을 수 없다고 여긴다. 예를 들어, 시각의 경우 보여지는 대상과 눈에 보여진 형상 그리고 이들을 결합하려는 의지는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의 경우, 정신(mind)과 정신 자신을 아는 지식 그리고 정신과 지식에 대한 정신의 사랑(love)은 동등하며 하나의 본질을 지니니 일종의 삼위일체를 이룬다고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인간 정신의 삼위일체는 신의 삼위일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 구별될 수 있는데 인간 정신의 삼위일체는 인간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정신이 신의 이미지이기 때문이며 신적 삼위일체의 이미지로서의 인간 정신의 삼위일체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신의 삼위일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또한 인간의 앎과 신의 앎 역시도 구별되는데 인간의 앎은 나의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적 감각에 의한 나 이외의 것들로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은 완전하기에 신의 앎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신의 말과 인간의 말도 구별된다. 먼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말에는 내적 말과 외적 말이 있다. 내적 말은 사유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아는 것을 말로 표현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생각은 마음의 입을 통해서 마음의 말을 하는 것이기에 내적 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내적 말은 그 자체로 전달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인 음성기관 혹은 글자 등을 사용해 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려고 한다. 이것이 외적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 말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나 사이의 내적 신호(sign)이며 음성, 동작, 문자는 내적인 말의 외부적 신호(sign)이라고 말한다. 물론 내적 말의 내적 신호(sign)는 내적 말의 봄(sight)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에게 있어서 내적 말과 외적 말은 서로 구별된다. 내적 말과 외적 말 이외에 신의 말이 있다. 신은 자신의 고유한 사유이기에 인간의 모든 내적 말을 본다(sight). 내적 말이 외적 말로 전해질 때, 내적 말이 변하는 것은 아니듯 신의 말이 내적 말을 통해 외적 말로 전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취하신 것이지 육신으로 변하신 것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과 신이 구별되듯이 신인 성부와 성자 역시도 구별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보냈으니 보내진 자는 보낸 자보다 못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하느님을 하느님 자신이 아닌 다른 자들의 관점에서 표현된 것을 근거로 제시된 입장이라고 대답한다. , 성자의 입장에서 하느님은 아버지이고 피조물의 관점에서는 주님이듯 성부와 성자를 구분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표현하는 방식에 의해 낳는 자와 낳아진 자를 구별해 성부와 성자를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우리 보다 우월한 존재인 신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성부와 성자간의 일체성을 말의 유비를 통해 설명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을 신의 말, 내적인 말 그리고 외적인 말로 구별한다. 여기서 내적인 말이란 신의 말이 발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외적인 말이란 내적인 말이 발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인간이 신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내적 말과 외적 말간의 관계를 통해 성부와 성자간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대한 사유는 고대 그리스적 사유와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성부와 내적 말은 항상 성자와의 관계 그리고 외적 말과의 관계를 통해서 밝혀지는데 이는 마치 플라톤의 원상(혹은 본, paradeigma)으로서의 이데아와 모상으로서의 현상계가 갖는 관계와도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우리 인간이 지닌 인식 능력으로는 성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오직 육화된 성부, 말하자면 성자를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데아계와 현상계를 구별한 플라톤의 이원론과는 달리 성부와 성자가 서로 재현적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데서 차이가 난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는 신의 말이 발화된 것인 내적 말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 우리는 오직 음성이나 문자를 통해 내적 말이 발화된 외적 말을 통해서만 신의 말이 발화된 것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는 표현과 이해의 문제와 관련된다. 표현의 문제는 음성화의 필연성과 관련되는데, 음성화의 필연성이란 사유는 사유 그 자체로는 이해되지 못하고 발화되고 나서야 이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은 소통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견지에서 외적 말이 내적 말을 대행(vertreten)하는 데는 두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내적 말은 외적말을 통해 현존(präsent)한다. 둘째, 외적 말은 내적 말을 재현(re-präsentieren)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자를 통해서 성부를 알 수 있으려면, 성부가 성자를 통해 현존(präsent)한다고 여겨지는 한에서만 그래서 성자가 성부를 재현(re-präsentieren)할 수 있는 한에서만 성자는 성부를 대행(Vertreten)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해되기를 원하는 신이 인간에게 인간으로 그 형상을 드러내신 것이 육화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이 육신을 취하셨지만 이를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현실계로 끌어 내렸듯 육화를 신의 본성에 대한 훼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내적 말과 외적 말 그리고 성부와 성자는 서로 구별이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부가 성자가 된 것도 아니며 내적 말이 외적 말이 된 것도 아니다. 다만 대행할 수 있는 하에서 대행적 동일성 혹은 재현적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육신으로 변하셨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말씀의 경우 육신을 취하셨을 뿐이며 육신으로 변하신 것은 아니다와 같은 언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외적 말이 내적 말 자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외적 말이 우리가 마음속에 가지고 있었던 말이며 외적 말은 비록 서로 다른 기호를 통해 표현되기는 하나 보편적 사유나 내용인 내적 말은 이해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내적 말이 외적 말로 재현되는 한에서 외적 말은 내적 말을 대행할 수 있고 또 이런 하에서 외적 말로부터 구분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양자간에 재현적 동일성이 성립한다는 말로 이들이 단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간에 상존하는 구분이 마치 구분이 아닌 듯 생각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화도 마찬가지다. 신의 말이 발화된 것인 내적 말은 외적 말을 통해 인간에게 매개되는 것처럼, 내적 말과 외적 말간의 이러한 관계는 성부와 성자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그 자체로는 비감성적이기에 감성적인 인간에게는 이해되어질 수 없는 신은 이해되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이해되어질 수 있는 육화된 성자, 즉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스스로를 정립한 것이다. 육화와 음성은 모두 다 이해되어 짐의 사건이고 또 이해되기 위해서 다른 것으로 됨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다른 것이 됨은 타자화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존재는 유지하되 다만 옷을 갈아입듯이 외적 기호를 그리고 육신을 취했을뿐인 것이다. 이렇게 성부와 성자는 재현적 동일성을 지니지만 완전히 일치되는 것은 아니며 매개적인 동일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그리스도를 매개로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신은 이해되어질 수 있는 신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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