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우리의 삶은 행복해야 하는가? 행복의 한자 표현은 ‘幸福’으로 다행할 ‘幸’(행)자에 복 ‘福’(복)자를 사용한다. 이러한 표현의 의미를 따르자면 행복이라는 것은 복된 삶을 누리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복된 삶이란 어떠한 삶인가? 어떤 사람은 복된 삶이 부(富)하고 귀(貴)한 삶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갑자기 공자님의 부귀재천(富貴在天)이란 말이 떠오른다. 이 말은 부하고 귀한 것은 하늘의 뜻이므로 우리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이해되곤 한다. 이런 말을 따르자면 ‘행복’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이 제시될 수도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부하고 귀하게 사는 것이나 삶의 목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우리 삶의 목표가 아니며 할 수 없는 것을 목표로 살 수는 없으니 우리 삶은 꼭 행복할 필요가 없다는 방향의 해석에 이르게 된다.
필자가 위와 같은 해석을 제시한 이유는 ‘행복’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로 이해될 수 있고 그것이 삶의 목표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싶어서다. ‘행복’의 영어 표현인 ‘happiness’ 역시 마찬가지이다. 리차드 클라우트(Richard Kraut, 1979)는 그의 “행복에 대한 두 가지 이해”(Two conceptions of Happiness)에서 ‘happiness’의 ‘hap’이 우연 혹은 운을 의미하고 ‘happy’의 사전적 의미가 ‘운이나 행운에 의해 규정되는’의 의미를 지닌다는 데서 우리가 암묵적으로 행운과 행복의 관계에 의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happy’를 행복을 소망하는 경우와 행복을 평가하는 두 가지 경우에 모두 이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happiness’가 아리스토텔레스의 ‘eudaimonia’와도 구별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이러한 사례들을 봤을 때, ‘행복’(幸福)과 ‘happiness’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eudaimonia’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 또한 같은 표현에 대한 여러 입장 역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행복에 대한 이러한 여러 입장이 있을 수 있음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은 삶의 목적이 아닐 수 있고 단순히 우리의 감정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일 수도 있다. 행복에 대한 여러 이론이 존재할 수 있음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입장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입장이 옳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행복에 대한 한 입장으로써 그가 행복한 삶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그 자체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거칠게 말해 그는 ‘행복’을 ‘우리의 삶 전체에 있어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라고 규정한다.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출 부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솔론(Solon)의 입장을 따라 행복은 포괄적(comprehensive)이어야 한다고 여기는 부분이다. 솔론은 어떤 사람이 행복했는지 행복하지 않았는지는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야 알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입장을 따르면서도 이러한 입장을 따르면 그 사람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는 그 사람이 죽은 이후의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된다. 하지만 행복이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면 이는 우연적이고 불안정한 것이며 우리가 추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솔론의 입장에 대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대답하는지에 대한 어윈(Terence Irwin)의 입장을 먼저 살펴 볼 것이다. 어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 운과 같은 외적인 요소들에 취약하다고 주장한 측면에서는 솔론을 따랐으나 이 요소가 우리가 불행한지 불행하지 않은지에 대해 결정하지 않는다고 여겼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은 덕스러운 행동이며 덕은 우리에게 비롯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통제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행복은 덕에 의해 보장된다고 해석한다. 필자는 어윈의 이러한 해석에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 어윈은 한 가지를 전제하고 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덕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운과 같은 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바라보았고 이 덕이라는 것은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는 것이라 그렇다는 것은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덕이 외적 요소에 취약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혹은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는지에 대해서 어윈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보충할까 한다. 결론적으로 이 글에서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윈의 이러한 해석을 따르기 위해서는 덕스러운 행위가 평가의 대상이 될 수는 있더라도 덕이 있는 행위의 행동 지침인 중용은 평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며 행복과 같이 제 1원리에 준하는 지위를 가져야함을 논할 것이다.
2.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2절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Nicomachean Ethics) 1권에서 소개되는 행복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해 살펴 볼 것이다. 먼저 행복이 왜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그것이 왜 덕에 따른 행동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왜 행복이 자족적이며 쾌락을 동반하며 결여된 것이 없어야 하는지에 대해 개괄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이해는 여러 측면에서 해석상의 논란이 많을 것이고 그러한 측면에서 2절에서 소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해석은 오해의 여지를 남길 수 있다. 다만 이 글의 목적은 불운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글이므로 그 이외의 영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해에 대해서는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에서 왜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1권 1장에서 그는 목적과 수단이 서로 다름을 설명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목적이 다른 목적의 수단이 될 수도 있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2장에서는 이렇게 나열된 모든 수단들의 목적이 없다면 어떤 수단에 대한 목적이 또 다른 목적에 대한 수단이 되는 무한 퇴행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이 선(Good)이어야 할 것이며 궁극적 선(supreme Good)일 것이라고 말한다.
7장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선은 여러 행동이나 기술에 있어서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논한다. 그리고 만약 그러한 행동이나 기술이 추구하는 목적이 여러 가지라면 그에 따라 다른 선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선들의 합 역시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이 여럿이 있다면 이들 중 가장 완벽하면서도 마지막에 있는 것이 있을 것이고 그러한 궁극적 목적이 되는 선이 행복(eudaimonia)이 아니겠냐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행복은 무엇인가? 앞서 언급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있는 모든 행독이 목표로 하는 목적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 선이기에 자족적이라고 말한다. 또한 7장 15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정의한다. 행복은 선이며 인간의 선은 인간 영혼의 활동이자 탁월성(excellence)이나 덕(virtue)에 순응한 그러한 것들 중의 가장 최고인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행복이란 영혼의 활동이자 덕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다.
8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쾌락(pleasure)과 함께함을 언급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행복이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이다. 그리고 덕에 따른 행위라는 것은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문제는 올바른 행동이라도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불쾌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얻는 육상선수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그는 올림픽에서 월계관을 얻는 사람은 월계관을 목표로 올바르게 행동하는(act rightly)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를 필자가 이해한 방향으로 의역하자면 월계관은 행복으로 올림픽에서의 바른 행동은 덕스러운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올림픽 육상 경기에 참석은 했으나 육상 트랙을 반대로 뛰는 등의 올바른 행동을 하지 않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면 월계관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월계관을 얻을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유사하게 행복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기꺼이 올바른 행동인 덕스러운 행동을 하고 싶어 할 것이고 이 행위를 통해 쾌락을 느낄 것이다. 만약 그러한 올바른 행동에 쾌락을 느끼지 않아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행복이란 월계관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얻을 자격도 없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덕스러운 올바른 행동에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성취할 자격이 없다는 방향의 해석이 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쾌락과 같은 욕구 충족에 대한 심리적 상태가 포함된다는 입장은 클라우트의 해석을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클라우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가장 행복한 사람(eudaimon)은 충분히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혼의 덕(virtues of the soul)을 실천하는 사람이며 지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그의 정의, 관대함 및 절제를 보여주는 철학적 활동과 도덕적 활동에 종사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가벼운 불행을 경험할 수 있으나 친구의 죽음이나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과 같은 심각한 불운을 (최근에) 겪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최소한 심적으로 불쾌한 상황에 항상 놓인 사람이 행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클라우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고려한 행복한 사람이 철학적/도덕적 활동에 종사한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점을 주목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지적이고 도덕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인간 최고 선(the greatest good)을 얻는 것이라고 여기며 원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들은 다른 주요 선(major good)인 명예나, 부 그리고 육체적 쾌락과 같은 외적 목적을 열망(desire)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클라우트의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해석을 따르더라도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심적 상태인 쾌락을 느낀다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9장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 운에 의해 주어질 수 있는지를 고려하며 행복이 전 인생(complete life)을 통한 완전한 선(complete goodness, telios)임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 전 인생을 통한 영속적 행복(permanent happiness)을 주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입장을 소개하고 이에 대해 일부 동의하며 이어지는 10, 11, 12장에 이르러 행복이 운이라는 외적 요소에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논한다. 바로 이 지점이 이 글에서 주요하게 다룰 부분이다. 이 지점에서는 어윈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속적 행복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절에서는 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어윈의 입장을 살펴보자.
3. 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
어윈은 그의 "영속적 행복: 아리스토텔레스와 솔론"(Permanent Happiness: Aristotle and Solon)에서 솔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솔론은 어떤 사람의 삶이 행복했는지에 대한 판단은 그 사람의 삶이 다 끝난 후에야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상당히 오랜 기간 행복을 영위한 사람이 죽음에 임박해서 엄청난 불운을 맞이해 불행하게 죽게 된다면 이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산 것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솔론의 입장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어떤 부와 명예를 누리더라도 죽는 바로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어떤 불행이 닥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섣불리 행복하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윈은 솔론의 이러한 입장을 받아들일 경우 어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일정 이상의 융통성(adaptable)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가한다. 자신의 행복을 일생동안 유지해서 생이 끝나는 날까지 행복하려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닥쳐올 수도 있는 불운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솔론의 입장에 대해 어느 정도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행복이 운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어윈도 언급하듯,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은 완전한 혹은 궁극적인 선이며 자족적(self-sufficient, autarkes)인 것이었다. 이는 행복은 결여된 것이 아무 것도 없어야 하며 따라서 포괄적(comprehensive)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만약 행복이 포괄적이라면 당연히 그 요소에는 운과 같은 외적 선(external good)이 포함된다. 행복은 궁극의 선이어야 함에도 만약 이것이 더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이는 궁극의 선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이러한 외적 선도 포함해야 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가 운과 같은 외적 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솔론의 입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윈도 지적하는 바다. 어윈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해지기 위해 앞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불운에 대해서 융통성 있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솔론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직관적으로 행복을 구성하는 선이 우리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므로 쉽게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일 것이고 그래서 타인들의 태도에 의해 결정되는 명예와 같은 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행복의 구성요소로 보이지 않을 것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 나의 행복은 내 안에 있으며 따라서 내 통제 하에 있는 것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므로 행복이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 밖에 놓인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솔론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위의 입장이 옳다면 행복을 구성하는 외적 선은 우리의 통제 내에 있어야 한다. 이 지점에서 어윈은 행복의 구성요소가 되는 외적 선의 역할을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덕스러운 행위의 도구로서의 역할이고 다른 하나는 행복의 기여자로서의 역할이다. 먼저 외적 선은 덕이 있는 행동을 위한 수단이 되고 덕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 외적 선을 적절히 활용할 것이다. 반면에 어윈의 해석에 따르면 모든 외적 선들이 덕스러운 행위에 사용되기 때문에 선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관대한 사람은 명예를 추구할 때 그것이 덕이 있는 행동을 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좋은 외적 선이기 때문에 덕의 적절한 보상으로서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외적 선은 행복에 필요한 것이며 이 중 몇몇은 그 자체로도 추구할만한 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정리해서, 어윈의 행복의 구성 요소가 되는 외적 선은 모두 덕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외적 선들이 덕과 격리되어 있다면 이는 악용될 여지가 있으므로 행복을 이루는 요소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의 요소로 받아들이는 외적 선은 주체의 통제 하에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주체의 덕이 있는 행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그렇다면 행운과 불운은 행복을 결정하는 외적 선의 요소로 포함될 수 있는가?
어윈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행복의 직접적인 구성요소가 되는 것은 '선의 확정가능한 유형'(determinable types of goods)개념을 도입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또 다시 선의 '확정적 유형'(determinate types of goods)과 '확정적 토큰'(determinate token)으로 구별된다. 그의 주장은 어느 정도 토큰이 모여져서 행복에 다다른 상태에 있을 때, 이러한 토큰이 몇 개 더 더해진다고 해서 더 나은 행복을 얻는 것은 아니고 토큰 몇 개를 잃는다고 해서 행복을 아예 잃고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논지를 편다. 그래서 행복은 확정될 수 있는 유형들로 이루어져 있고 내가 만약 이 모든 유형들을 충족시키는 확정적 유형 혹은 토큰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행복함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어윈의 이러한 분석에 대해 지나치게 파고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과 외적 선인 운간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윈이 위와 같은 개념들을 통해 설명하려고 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에 대한 입장이다. 행복의 영속성에 대해 언급하며 아리스토텔레스틑 10장 14절에서 행복한 사람은 비참해 질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이 사람이 불운을 맞이해 궁극적으로 축복 받지는 못하더라도 말이다.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덕이 있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불운한 상황에서 덜 행복할 수는 있지만 행복하지 않은 수는 없다. 반대로 운이 좋지만 덕이 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는 차이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행복은 불운한 상황에 취약하나 이러한 운이 행복을 결정하지 않고 행복을 결정하는 주요한 요소는 그 주체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방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한다. 어윈 또한 이 지점을 잘 설명해 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은 솔론이 고려했던 것 보다 더욱 안정적이며 이는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는 덕에 의해 통제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이 지점이 어윈이 핵심적으로 주장하는 지점이다. 어윈의 해석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이 행복을 운과 같은 외적인 요소들에 취약하다고 봤고 이 지점에 한해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가 불행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한다고 바라본 솔론의 입장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은 분명 외적인 요소들에 취약한 부분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행복에 있어서 그리 중요한 부분은 아니며 행복을 결정하는 중요한 부분은 덕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이고 덕은 우리에게서 비롯된다. 또한 우리의 통제 하에 놓여있기 때문에 행복은 덕에 의해 담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덕의 위치이다. 어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이 덕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운과 같은 외적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 덕이라는 것은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는 것이라 그렇다는 것은 전제하고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왜 덕이 외적 요소에 취약하지 않다고 여겼는지 혹은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지 않는지에 대해서 어윈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다. 어윈이 설명하지 못한 이 지점을 보충하기 위해 행복의 영속성을 언급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들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4. 행복과 덕이 있는 행동은 평가 받을 수 있는가?
니코마코스 윤리학 1권 9장에서 13장에 걸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의 영속성과 그것이 왜 운에 취약하며 행복이 왜 운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의 입장을 따라 행복은 전 일생(complete life time)이 행복해야지 어느 한 순간만 행복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제시한다. 10장에서는 솔론의 입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문제는 이러한 영속성이 그 사람의 삶 이후까지 이어지는 경우다. 솔론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행복했는가는 그 사람이 죽은 이후에나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경우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이 죽고 나서 나쁜 평가를 받는 다면 이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제기한다. 이 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는 것이 안정성이 있는 것이며 사후의 평가에 의해 그 사람의 행복이 좌우된다면 이는 운에 의해 행복이 규정되는 것이니 옳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행복은 불운에 취약함 역시도 언급을 한다. 하지만 10장 13절에서 행복한 사람은 비참할 수 없다는 평가를 제시하며 불운과 같은 외적 요소가 행복한지 하지 않은지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제기한다. 12장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하다는 것이 다른 사람의 찬사(praise)를 통해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논한다. 다시 말해 찬사를 받는다면 행복한 삶이었던 것이고 찬사(혹은 칭찬)를 받지 않는다면 행복한 삶이 아니었던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그는 최고의 것은 찬사(혹은 칭찬)이 아닌 축복을 받는 것(blessed)이라고 말하며 찬사라는 것은 낮은 존재에게나 사용할 수 있는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12장 4절에서 8절에 이르러 찬사라는 것은 신이나 선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며 더욱이 제 1원리이자 신적인 행복에는 더욱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을 제시한다. 정리하자면, 행복은 사람들의 찬사나 칭찬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것이 13장에서 제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는 것은 완벽한 선에 순응하는 영혼의 활동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앞서 언급했듯이 완벽한 선에 순응하는 영혼의 활동은 덕이 있는 행동에 순응하는 영혼의 활동을 말한다. 다시 말해, 행복은 찬사나 칭찬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사람의 삶 이후에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사람이 살았던 전 인생에 있어서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을 했는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는 3절에서 어윈이 내렸던 결론과 동일하다. 문제는 행복은 찬사나 칭찬에 의해 평가될 수 없지만 덕이 있는 (영혼의) 활동은 찬사나 칭찬에 의해 평가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냐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찬사나 칭찬은 불가능하지만 사람이나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찬사나 칭찬은 가능하다. 사람의 행동에 대한 찬사나 칭찬이 가능하다면 그 사람의 행동이 덕이 있는 행동인지에 대해 찬사나 칭찬이 가능할 것이고 이는 덕이 있는 행동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다는 것을 말한다. 어윈은 이 지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덕이 있는 행동이라 여겼던 것이 그 사람의 사후에 덕이 있는 행동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수는 없는가? 만약 그러한 상황이 가능하다면 덕이 있는 행동은 운에 취약하고 그렇기에 행복 역시도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혹은 어떤 사람이 행복하게 살았다고 여기고 죽은 것이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이라는 것이 심리적 요소를 가미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이는 행복의 당사자가 자신이 행복한지 행복하지 않은지를 안다는 것을 말하며 그의 행복함에 대해 무지할 수 없다는 것을 얘기한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덕에 기인한 행위를 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여겼지만 그 행동들이 그 사람의 사후에 덕스러운 행위가 아니라고 평가되어 그 사람이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여겨질 수는 없는가? 어윈은 덕이 외적 선인 운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으나 덕이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이는 운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이 무엇인지에 대해 어윈은 전혀 설명하지 않고 있으며 이 부분이 설명될 필요가 있다.
5. 아리스토텔레스의 덕과 중용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에 들어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의 본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1장에서 그는 덕에는 지적인 덕(intellectual virtue)과 도덕적인 덕(moral virtue)이 있다고 말한다. 지적 덕은 가르침을 통해 향상될 수 있고 도덕적 덕은 습관(habit, ethos)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덕은 감각과 달라서 태어나면서부터 소유함과 함께 즉각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연습함으로써 현실태가 되는 종류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행동을 위해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행동을 스스로가 숙고해서 선택해야 하며 그 행동이 스스로에게 영속적으로 고정되도록 꾸준한 성격의 성향(disposition of character)으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5장에 이르러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상태는 감정(emotion)이거나 능력(capacity)이거나 성향(disposition)일 테니 덕은 이 셋 중의 하나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덕은 감정은 아니며 좋고 나쁨을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고 없고로 판단하지도 않으니 능력도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그리고 이로부터 덕은 성향이라고 주장한다. 6장에서 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라는 성향이 중용(mean)을 따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선 그가 말하는 중용이 양적인 것인지 질적인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도록 한다. 또한 랩(Christof Rapp)과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이 덕을 실천하는 행동지침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글의 목적에 있어 이러한 입장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에 대해 언급한 맥락은 덕을 실천하기 위한 행동지침을 의도한 것으로 보이며 그렇지 않다면 덕을 '중용을 따르는 성향'이라고 언급할 이유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6장 11절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올바른 시간과 올바른 때 그리고 올바른 사람과 올바른 목적에 올바른 행동을 지니는 것이 덕의 표준(mark of virtue)이라고 설명한다. 15절에서 그는 덕이란 행동과 감정의 선택을 결정하는 마음의 고정된 성향이고 이는 본질적으로 우리에 대한 (상대적인) 중용을 관찰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는 신중한 사람이 결정할 원리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한다. 중용은 옳음의 관점에서는 극단이나 이는 다른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고 설명한다.
이제 외적 선인 운과 행복의 관계에 있어 덕과 중용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덕이 있는 행동이라는 것은 중용을 따르는 성향이 발휘된 것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거나 옳음의 관점에서는 극단에 있는 영혼의 상태일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의 행동이 불운에 취약하다면 이는 중용의 중간적 위치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덕이 있는 행동은 중용을 따르기에 어떤 사람의 사후에 불운에 의해 변할 수 있는 취약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그 중용의 기준 역시 변할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 가능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행동 지침으로써의 중용을 따를 때, 행복이 제 1원리이듯 중용에 의한 덕이 있는 행위 역시 제 1원리에 준하는 그러한 특수성을 지녀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특수성을 지니는 대상은 중용이라는 표준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덕이 행복과 같이 평가될 수 없는 종류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행복은 덕이 있는 행동을 통해 성취되는 최고선이자 마지막에 있는 목표이지만 덕이 있는 행동은 이 행복이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목적은 고정되어 있으나 덕이 있는 행동은 그러한 성향을 영속적으로 고정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하지만 덕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는 기준은 중용이어야 한다. 우리가 꾸준히 수행을 통해 중용을 따르는 덕이 있는 영혼의 활동을 하는지는 평가될 수 있더라도 중용이라는 기준은 우리의 평가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중용의 기준이 평가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것이라면 덕이 있는 행동의 기준 역시 변하게 될 것이고 행복은 우연적일 뿐만 아니라 불운에 취약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덕이 있는 행동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평가될 수 있으나 중용이라는 행위의 기준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평가될 수 없는 특수한 위치를 지녀야 할 것이다.
6. 결론
지금까지 필자는 행복의 영속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살펴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행복은 영속적인 것이며 삶의 한 순간만 행복한 것이 아닌 삶의 전체에서 행복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행복은 불운에 취약하나 그렇다고 해서 행복이 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덕이 있는 행동에 의해 행복한 삶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행복은 삶의 최고선이자 마지막에 있는 목표로써 삶의 제 1원리이고 그래서 칭찬이나 찬사와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의 사후에 평가될 수 없는 것이 된다. 다만, 그 사람이 덕이 있는 행동을 하며 살았는지는 평가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의 삶이 행복했는지가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덕이 있는 행동은 행복이란 목표를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그 사람이 덕이 있는 행동을 하고 하지 않고가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 덕스러운 행동의 기준인 중용의 기준이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용의 기준은 행복이 삶의 제 1원리이듯 이에 준하는 특수한 위치를 지녀야 할 것이다. 이 지점은 어윈이 설명하지 못한 지점이며 이러한 설명이 옳다면 어윈이 설명하지 못한 지점을 채웠다는 측면에서 이 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데 있어 일정 이상의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Aristotle, The Nicomachean Ethic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Richard Kraut(1979), “Two Conceptions of Happiness,” The Philosophical Review, Vol. 88, 2, 167-189.
Christof Rapp(2006), "What use is Aristotle's doctrine of the mean?", The Virtuous Life in Greek Ethics, 99-126.
Terence Irwin(1985), "Permanent Happiness: Aristotle and Solon." Oxford Studies in Ancient Philosophy, 3:89-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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