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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UK-US춰락

헤스켈 커리(Haskell Curry)의 “Remarks on The Definition And Nature of Mathematics"

by 로짘 2020. 2. 29.

2013년 2월 14일 작성.

마지막(?) 형식주의자라고도 불리는 커리(Haskell Curry, 카레가 아닙니다.)의 "Remarks on The Definition and Nature of Mathematics"에 대한 학부생의 논평입니다. 제가 썼던 거고요. ㅋㅋㅋ 최근에는 하트리 필드(Hartry Field) 같은 유명론자(nominalist)도 형식주의자(formalist)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어찌됐건 아래 복사한 과거의 제 글을 다시 읽으니 신기하네요. 첫째로 의외로 착착 감기게 글을 썼습니다. "지금 보다 그때가 글을 더 잘 썼나?"라는 의구심과 인간은 퇴행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물론 문제가 많은 글입니다. 조금 잔인하게 평가하자면, 이 글은 논평이기 보다 요약 및 본인의 감상을 쓴 글이기 때문이죠. 커리의 형식주의에 대한 논평이 되려면 커리가 지니고 있는 형식주의적 입장이 가정하는 바를 명시하고 그 가정이 왜 틀렸는지에대해 혹은 그러한 가정들이 서로 어떻게 모순을 일으키는 지에 대해 찾는 것이 언급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한 형식주의자의 학자적 신념 및 자세에 대해 공격하고 있네요. 아마도 제목이 "커리의 학자적 태도에 관한 견해"(Remarks on Curry's scholastic behavior)였다면 점수가 더 나갔을 것 같습니다. 요약이 제대로 됐는지도 평가해야 하지만 요약은 잘 됐다는 가정 하에. B0 드리겠습니다. 과거의 저는 현재의 저를 정말 싫어하겠군요. 저도 싫습니다. ㅋㅋㅋㅋ :)

Remarks on "Remarks on The Definition And Nature of Mathematics"


커리(Haskell B. Curry)의 「수학의 개념과 본성에 대한 비평(Remark on the Definition and Nature of Mathematics)」은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단락은 “수학적 참의 문제”로서 수학의 본성에 대한 플라토니즘(Platonism)과 직관주의(Intuitionism)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된다. 두 번째 단락은 형식주의의 아이디어에 대한 소개와 함께 수학에 있어 이러한 논의는 불필요함을 설명한다. 마지막 단락에서 앞서 주된 문제가 되었던 진리(참, truth)의 문제를 수용가능성(acceptability)라는 개념을 사용해 설명한다.

 

1. 수학적 참의 문제(The problem of Mathematical Truth)


1단락에서의 주된 내용을 요약하자면 플라토니즘의 형이상학적 대상(metaphysical character)과 직관주의의 원관념(ur-intuition)은 다음과 같은 속성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이는 단순한 가정일 뿐이라고 한다.

ⓐ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활동이어야 한다.(It is essentially a thinking activity.)
ⓑ 선험적이어야 한다.(It is a priori.)
ⓒ 언어에 독립적이어야 한다.(It is independent of language.)
ⓓ 모든 생각할 줄 아는 존재들에 있어 객관적인 능력이어야 한다.
(It is objective in the sense that it is the same in all thinking beings.)


물론 플라토니즘에 있어 ⓓ는 ‘객관적인 능력’이 아닌 ‘객관적인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고 ⓐ는 직관이라는 것을 통해 추상적 대상을 파악할 수 있지 않는 한 플라토니즘에는 적절하지 않다. 사실 커리는 이 논문에서 플라토니즘에 대한 언급에 적극적이지 않고 단순히 경험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이유로 논의를 피한다. 하지만 최소한 위의 네 가지 요소가 플라토니즘에까지 적용되는지는 의문이다. 모든 요소는 “생각하는 능력” - 아마도 직관이라 부르는 - 에 기대어 있는데 존재자라 함은 “생각하는 능력”과도 독립적이다. 아마도 커리의 입장으로 본다면 그러한 추상적인 존재자를 인지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요소가 더 알맞을 것이다.

ⓐ 경험적으로 인지 되어야 한다.
ⓑ 경험적으로 인지되지 않는다면 생각하는 활동의 과정(및 추론)을 통해 그 존재가 인정되어야 한다.
ⓒ 언어에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 그 존재자의 존재가 객관적으로 인정되는 객관적 대상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와 ⓓ의 경우 논의되어야 할 측면이 매우 많아 보인다. 단순히 추상적 존재자에 대한 부정만을 논의한다면 커리는 더 많은 철학적인 입장을 따져야 할 것이며 수학적 존재자에 대한 얘기를 하려 한다면 플라토니즘(논리주의)에서 수학적 대상의 존재자를 인정할 필요가 없음에 대해 보다 나은 논의를 펼쳐야 할 것이다.

 

2. 수학에 대한 형식주의 개념(The Formalist Definition of Mathematics)

 

2단락에서 커리는 형식주의의 입장을 설명하며 형식적인 체계(Formal System)에 있어 수학적 대상의 본질에 대한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형식적인 체계를 이해하려면 기초명제(elementary proposition)가 참이라는 언급(representation)의 문제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게(Frege), 힐버트(Hilbert), 카르납(Carnap)이 대표적으로 이러한 작업을 했음을 언급하며, 이들의 작업은 “형식적인 체계가 인공언어의 형식화된 구문론(the formalized syntax of an object language)과 본질적으로 동일함(essentially equivalent)”을 보여주고 이러한 언급(representation)은 명확하고 견고하게(definiteness and concreteness) 구성되었다는 장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 기호를 단순히 항들(terms)의 이름붙임(naming)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항들의 사용 자체를 구별하기 위해 사용되며 괄호, 컴마 등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적형식(well formed formula)을 구성하지 못하게 되고 이는 수학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한다.

 

 


이 장에서 그는 이러한 논변 외에도 진리치를 따지는데 있어 실재론적인 논변을 주장하는 논리주의의 방식에 대해 “본질적이지 않은 고려(extraneous considerations)”라고 말하며 “참”을 말할 때 그러한 고려가 없어도 충분하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형식주의자가 가지는 수학의 개념은 “수학은 형식적인 체계의 과학으로 수학의 명제는 어떤 형식적 체계나 그러한 체계의 집합에 대한 기초적이거나 초이론(metatheoric)적인 것이다.”라고 한다. 수학에 대한 논리주의, 형식주의 혹은 직관주의와 같은 이러한 해석들을 하지 않아도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수학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형식적인 체계에 작용하고 있고 이들은 회기적인 정의(recursive definition)와 수학적 귀납법(mathematical induction)과 같은 우리의 직관이 충분히 허용하는 직관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를 통해 그는 괴델(Gödel)과 스콜렘(Skolem)의 불완전성 정리 역시 반대한다고 한다.


커리의 이러한 입장에 대한 비판은 다음 단락에서 펼치는 그의 논변과 함께 진행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커리는 다음으로 수학이 다른 학문에 사용되는 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일관성(consistency)에 대해 그가 가지는 입장은 눈여겨 볼만한 것 같다.

3. 진리와 수용가능성(Truth and Acceptability)

3단락에 와서 커리는 수용가능성(acceptability) 개념을 차용하여 수학이 여타 다른 과학에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말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에 따르면 ‘수용가능성’이란 하나의 명제에 적용되는 것이 아닌 어떠한 체계 전체에 적용되는 준 진리 개념(quasi-truth concept)으로 ‘수용가능성은 어떤 체계의 기반 문제(subject matter)와의 관계에 있어 어떤 이론을 해석하는 방법이다.’라고 한다. 수용가능성은 해석(interpretation)의 문제이 있어 어떤 형식적 체계의 명제에 대한 진리와 관련된 직관에 대한 동의에 기반이 있고 언급(representation)의 문제에 있어 기반 체계에 의해 언급하는 술어(predicate)가 정의되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체계의 “목적”과 관련된 개념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물리학에 적용되는 고전수학(classical mathematics)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언급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 전제의 직관적인 증명(the intuitive evidence of the premises)
ⓑ 일관성(consistency which is an internal criterion)
ⓒ 이론전체에 있어 유용성(the usefulness of the theory as a whole)

그에 따르면 직관주의는 고전수학이 직관적인 증명을 간과한다고 하며 직관주의가 건설한 체계는 고전수학(논리)보다 직관적인 증명을 더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체계는 너무 복잡에서 ⓒ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한다.


직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을 떠나 그는 “일관성”에 대한 얘기를 시작하는데 힐버트(Hilbert)는 직관주의와 같이 선엄적인 정당화를 위해 일관성을 강조했는데 이렇게 까지 강조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물리학에 있어 선험적인 정당화는 적절하지 않으며 - 경험적인 정당화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 수용가능성에 있어서 일관성 증명은 필연적이지도 그리고 충분하지도 않다고 한다. 다른 예로 넘어가 그는 18세기의 수학은 일관적이지 않았지만 18세기의 수학적 결과물을 버리지 않았으며 비일관성은 어떤 이론을 완전히 파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이 보완되어야 함을 말한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그는 수용가능성은 진리에 대한 얘기가 아니며 이를 통해 수학적 참이 다른 학문과 양립가능함을 보여주는 바라고 한다. 말하자면 수학과 진리와의 관계는 완전히 별계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 같다.

4. 커리의 입장에 대한 수용가능성

커리의 입장을 따르자면 “수학의 본질은 무엇인가?”, “수학적 참은 실재 진리인가?”, “수학은 실재 존재하는 추상적 대상인가?”와 같은 철학적인 입장과 수학의 사용은 구별되어야 된다는 말로 들린다. 적어도 수학에 있어서 그러한 것은 따질 필요가 없다는 말로 불완전함을 가진 상태로 그것을 보완해 가며 계속 진행해 가도 큰 문제가 없다는 입장으로 보인다.


하지만 수학자의 입장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직관주의의 방식과 형식주의의 방식에 대해 유용성을 거론하며 작업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다. 스테로이드 약물은 운동선수들에게 좋은 기록을 내는데 있어 유용하지만 아무런 고려도 없이 무분별하게 약을 사용한다면 결국 몸을 망치고 만다. 수학 기초론에 있어 각 입장에 의해 수학이 사용되지 않게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수학의 기초에 대한 각자의 고려는 병행되어야 한다.


프레게는 그의 『개념기호법』의 서문에서 논리학과 심리학이 서로 다름을 발견과 정당화의 문제를 구별함으로써 밝힌다. 그리고 경험적인 사실을 배제한 가장 순수한 부분에 의해 이루어지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그 부분을 논리학의 주제가 되는 부분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정당화하는 생각(직관)의 방식을 체계적으로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는 또 그의 이러한 작업이 철학과 과학의 올바른 발전에 도움이 되는 유용한 도구가 될 것임을 밝힌다. 프레게가 논리학에 대해 가지는 생각과 커리가 수학에 대해 가지는 입장을 비교해 볼 때, 적어도 수학이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직관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커리는 수학과 진리간의 관계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는가 생각된다.


커리가 말한 수학의 정신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학자의 정신은 “진리의 탐구”이며 수학은 그 진리탐구에 매우 큰 역할을 해 왔다. 이 세계를 파악하는 우리 이성(직관)이 논리학, 수학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프레게는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하려 했을 것이다. 굳이 프레게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현대에 있어 게임이 사람들에게 레져를 제공함으로써 가치를 지닌다면 수학은 현재의 인류를 있게 해준 가장 큰 공로자로서 가치를 지녀야할 것이다. 수학이 땅 위로 뻗은 커다란 건물을 쌓아올리는 작업이라면 수학 기초론 혹은 철학은 땅 아래의 기반을 다지는 작업일 것이다. 그가 말한 수학의 사용과 수학적 참이 진리인가 혹은 수학의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서로 구별됨은 인정하겠지만 이러한 질문들은 중요치 않은 질문으로 여기는 그의 입장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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