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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UK-US춰락

심적인과(Mental Causation) 문제를 개괄적으로 알아 봅니다.

by 로짘 2020. 1. 30.

몸과 마음의 인과관계에 관한 문제는 데카르트에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존재가 정신과 신체라는 두 가지 실체로 나누어짐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공주는 정신은 사유를 본질로 가지고 공간에 위치해 있지 않지만 신체는 연장성(extension)을 지니고 공간에 위치해 있는데 어떻게 연장성을 지니지 않은 정신이 연장성을 지닌 신체에 영향을 미치냐고 묻는다. 엘리자베스 공주의 물음은 현재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비물리적인 마음이 물리적인 신체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으로 고려될 수 있다. 특히 물리적인 사건의 원인은 항상 물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물리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를 고려할 때 이러한 물음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현대 이전의 마음에 관한 문제는 다소 존재론적인 성격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말하자면, 데카르트와 부수현상론과 같은 심신이원론의 주장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substance)로 인정해 비물리적인 마음이 어떻게 실체로써 물리세계와 상호작용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봉착했던 것이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이 상호작용함을 설명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결합(union)되어 있음을 근거로 들었고 그러한 결합의 정당성을 주장하는데 있어 심신간의 상호작용을 근거로 고려해 순환성의 오류에 빠져든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를 인지한 헉슬리(Huxley)는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호작용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한다. 그에 따르면 마음의 작용 자체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나 기적소리가 기관차의 물리적 작용에 따라 부수적으로 생기는 현상이듯 마음의 현상 역시 하나의 부수적인 현상으로 바라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부수현상론을 주장한다. 즉 마음과 신체가 서로 다른 실체이기는 하나 마음이 물리적인 신체와 상호작용해야 하는 것은 아님을 설명함으로써 심신이원론을 주장한 근간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의 신체가 혹은 물리적인 신경생리학적인 작용이 비물리적인 마음을 부산물로써 산출하게 되는가에 대한 물음에는 아무런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며 사실상 데카르트가 직면했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현대에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비물리적인 실체로써의 마음을 지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상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을 어떤 특수한 속성들을 가진다거나 어떤 능력 혹은 특징들을 지닌다는 방향에서 마음이 지니는 역할을 인정한다. 말하자면, 심적인 실체가 존재함은 대다수가 부정할지라도 심적인 속성(property)의 존재 그리고 심적인 사건(mental event)이 발생할 수 있음은 충분히 논의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고려한다. 심신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 바뀜에 따라 심신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문제는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인과관계에 관한 문제로 전환되기에 이른다. 특히 심적 인과(mental causation)에 대한 문제는 1970년 데이빗슨(D. Davidson)‘Mental Event’를 기점으로 현재까지 논의되어 오고 있다. 데이빗슨은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입장을 부정하고 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과 수적으로 동일하다는 개별자 물리주의(token physicalism)를 주장함으로써 심적 사건의 인과력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다. 만약 그의 말처럼 심적 사건이 그것과 관련된 개별적인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면 물리적 사건들 간의 인과관계는 문제 될 것이 없으므로 심적 사건의 인과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다음과 같은 무법칙적 일원론의 세 가지 원리를 중심으로 논변을 제시한다.

 

  1. 인과적 상호작용의 원리(Principle of Causal Interaction): 적어도 어떤 심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한다. 말하자면, 심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의 원인인 상황이 존재한다.
  2. 인과율의 법칙적 성격 원리(Principle of Nomological Character of Causality): 만일 사건 c가 사건 e의 원인이라면, c와 e를 포괄하는 엄밀한(strict) 법칙(law)이 존재한다.
  3. 정신의 무법칙 주의(Anomalism of the Mental): 정신은 무법칙적이다. 심적 사건을 예측할 수 있거나 설명할 수 있는 어떠한 엄밀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리적 법칙도 심리물리적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1은 심적 인과가 진정으로 발생함을 언급하는 것이며 2는 엄밀한 법칙이 인과에 필수적이라는 것 그리고 3은 심적 인과를 설명하는데 있어 엄밀한 심리학적 법칙 혹은 정신물리학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음을 언급한다. 이제 데이빗슨의 논변을 살펴보자. 무법칙적 일원론의 인과율의 법칙적 성격 원리에 의해 우리는 다음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심리적 사건 M이 물리적 사건 P의 원인이라면, M과 P를 포괄하는 엄밀한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인과적 상호작용의 원리에 의해 우리는 위 문장과 전건긍정에 의해 위 문장의 후건을 얻는다.

 

M과 P를 포괄하는 엄밀한 법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신의 무법칙 주의에 의해 M과 P를 포괄하는 엄밀한 법칙은 심리적 법칙도 심리물리적 법칙일 수도 없으니 물리적 법칙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물리적 사건의 원인은 항상 물리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물리세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를 다를 때, 이 엄밀한 물리 법칙이 포괄하는 M과 P는 심리적 사건일 수 없다. 그러므로 M과 P는 모두 물리적 사건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심적 사건들은 물리적 사건들이다.’

 

데이빗슨은 이러한 논변을 통해 개별적 물리주의를 정당화 한다. 하지만 그의 무법칙적 일원론은 여러 방향에서 비판받는데 이중 가장 치명적인 비판은 심적인과의 문제와 관련했다.

 

애초에 데이빗슨이 무법칙적 일원론을 통해 설명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되는 개별적 물리주의를 주장함으로써 심적 인과가 사실상 이와 관련된 개별적인 물리적 사건간의 인과관계임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위와 같은 논변은 겉으로 보기에 심적 사건들의 인과력을 확증하는데 성공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상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 간의 인과적 관련성에 대한 설명이 주어졌음을 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인과관계를 일으키는 것은 심적 속성에 대한 예화가 아니라 오히려 물리적 속성의 예화라고 논증함으로써 심적 사건이 어떠한 방식으로 물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제시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데이빗슨은 앞서 부수현상론이 겪었던 것과 유사한 물음에 다시 봉착할 수 있다. ‘어떻게 심적 인과관계가 가능한가?’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그 내용을 달리하여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제시될 수 있다. ‘물리적 사건들을 의미화한 심적 원인들은 물리적 원인에 의해 배제된 것인가?’ 만약 심적 원인들이 물리적 원인에 의해 배제된 것이라면 심적 사건들은 더 이상 인과적 힘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이는 데이빗슨이 최초로 도입한 수반’(supervenience) 개념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김재권 교수는 데이빗슨의 수반개념에 대한 설명을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시킨다. ‘ A가 B에 수반한다.’는 말의 의미는 거칠게 말해 A가 지닌 속성은 B가 지닌 속성에 의존한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김태희와 물리적으로 동일한 두 사람이 서있을 때, 한 사람은 아름다움의 속성을 지니나 다른 한 사람은 아름다움의 속성을 지니지 않는 경우는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우리는 아름다움의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심적 속성이 물리적 속성에 수반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물리적으로 식별불가능함이 심리적으로도 식별불가능함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반 개념을 통해 우리는 심적인과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아래와 같은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통증이라는 심적 사건이 근육수축의 원인이 된 경우를 고려한 것이다. 수반 개념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비물리적인 심적 사건인 통증이 어떻게 근육수축이라는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피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통증은 C-신경세포의 자극(C-fiber activation, 줄여서 Cfa)에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육수축의 원인은 Cfa일 뿐이고 통증은 Cfa에 수반하는 심적 사건인 것이다. 이렇게 통증은 근육수축의 원인으로 고려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상관관계 역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적 인과에 대한 대답이 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심적 현상이 다른 심적 현상을 일으키는 경우를 얼마든지 고려할 수 있고 이는 심적 속성이 다른 심적 속성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수반물리주의에 따르면 어떤 심적 속성 M1이 발생하기 위해서는 M1이 수반하는 물리적 속성 P1이 발생했기 마련임을 생각하게 된다. M1이 다른 심적 속성 M2의 원인으로써 역할을 하려면 M1M2를 예화하기 위해 발생하기 마련인 물리적 속성 P2와 수반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M1이 발생했다면 M1이 수반하고 있는 P1이 발생했기 마련일 것이고 이에 P1이 원인이 되어 P2를 유발했을 때, P2의 발생에 의해 P2에 수반하는 M2가 발생하는 방향에서 M1M2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M1M2간의 실질적인 인과관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P1P2에 수반하지 않는 한 M1이 직접적으로 M2의 원인이되는 길은 없는 것이다. , 수반모델에서의 심적 사건의 인과관계는 물리적 사건의 인과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뿐이며 이에 의존하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또한 물리 세계의 인과적 폐쇄 원리를 고려할 때, M1으로 부터 P2로의 인과관계는 더더욱 인정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심적 인과에 관한 설명을 제시하려던 데이빗슨과 김재권 교수의 시도는 사실상 부수현상론이 봉착하는 문제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한 것이 되고 만다.

 

데이빗슨의 개별적 물리주의는 일종의 심신동일론으로써 퍼트남(Hilary Putnam)의 다수실현 논변에도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개별적 물리주의가 지니는 생각은 하떤 심적 속성에 대해 유일한 물리적 속성이 있음을 전제하는 것인데 예를 들어 통증이란 심리적 속성은 Cfa라는 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퍼트남은 다수실현 논변을 통해 통증은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도 지닐 수 있는 심적 속성이므로 생명체 마다 그에 상응하는 여러 물리적 개별자가 다를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한 것이 기능주의인데 기능주의는 심적 속성은 기능적 속성임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쥐덧의 속성은 그것이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던 철로 만들어져 있던 쥐를 잡는 기능만을 지니면 되므로 쥐덧의 속성이 그것을 구성하는 물리적 속성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능주의자들은 심적 속성은 기능적 속성이므로 그러한 기능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에 의존하지 않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기능주의도 역시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데는 성공적이지 않다.

 

기능주의를 소개하면서 설명했듯이 기능주의는 두 가지 전제를 가진다. 하나는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심적 속성의 인과력에 대한 전제이다. 하지만 만약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을 지닐 경우 어떠한 심적 속성 M의 기능은 다양한 물리적 상태 Q1, Q2, Q3 등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 문제는 어떠한 물리적 상태에서 심적 속성 M이 실현되느냐에 따라 그것이 지닌 인과력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위 쥐덧의 예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쥐덧이 지니는 인과력은 인과적 역할을 하고 기능하는 그것의 부품에 따라 달라진다. , 쥐덧이 지니는 인과력은 그것의 기능을 실현시키는 물체의 인과력을 말하는 것과 같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적 상태 M이 지니는 인과력은 그것을 실현시키는 물리적 상태를 선언(disjunction)으로 연결 시킨바가 된다. 그러므로 M=(Q1Q2∨ ⋯ ∨Qn)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M은 단일한 인과력을 발휘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보기가 힘들어 진다. 말하자면 쥐덧의 속성은 나무로 만들어져있을 때, 쇠로 만들어져 있을 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을 때의 이질적인 인과력들이 선언으로 묶여있는 상황이 되니 도데체 쥐덧은 어떠한 종류의 인과력을 지니는 것이냐는 물음이 가능하다. 이렇게 기능주의는 심적 인과에 대한 통일성 있는 혹은 보편적인 설명에 실패함으로써 심적 속성의 다수실현 가능성과 심적 속성의 인과력에 대한 전제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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