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춰락/서양 옛날 및 EU춰락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 정의론이 지니는 차이와 긴장에 대해.

by 로짘 2020. 2. 15.

플라톤 <국가>에 나타난 올바름에 대한 논의는 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시마코스의 논쟁과 2권에서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올바름에 대한 입장을 통해 알아 볼 수 있는 전통적 정의론과 플라톤의 정의론을 비교해 봄으로써 알아 볼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입장 비교 역시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국가>에 나타나는 전통적 정의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되갚음적 정의,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의 공리주의적 정의, 법이 곧 정의인 법률주의적 정의를 지닌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트라시마코스의 입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론은 기본적으로 올바른 것이란 더 강한자의 편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의사가 환자에게 편익이 되는 것을 행하듯이, 통솔자는 다스림을 받는 쪽에 편익이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떠한 기술이나 다스림도 다스림을 받는 쪽에 이득이 되는 것을 제공하지 더 강한 자의 편익을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올바름의 정의가 애초에 트라시마코스가 말했던 정의와 정반대의 것이 된다. 이는 트라시마코스가 덕의 범주와 기술의 범주를 혼동했기 때문에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트라시마코스의 입장에 따르면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기 때문에 강자는 자신의 이익에 맞는 법을 만들고 이것이 정의로운 법이 되며 피지배자들이 이를 어길 경우 범법자로 처벌하게 된다. 하지만 지배자들의 과오로 인해 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법률을 제정하였을 경우 이 또한 정의인가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고 강자들이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의라는 것은 자의적인 이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선한 도덕적인 근거를 갖는 한에서 정의로운 것 아니냐는 비판이 가능하다.

 

<국가> 2권에서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올바름에 대한 논쟁이 소개된다. 이들은 사람들이 올바름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수나 평판 때문에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올바른 사람보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누린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올바름 자체가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국가를 가상으로 수립해 올바름에 대해 탐구해 나간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탐구방식을 배운 플라톤은 국가의 정의를 통해 개인의 정의를 고찰한 후 정의가 그 자체로써 좋으며 결과로써도 좋은지에 대해 알아본다.

 

먼저 플라톤은 <국가> 4권에서 영혼의 정의에 대해 소개한다. 그는 영혼을 이성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누며 비이성적인 부분은 이성에 순종하는 부분으로써 기개가 존재하며 이성에 불복하는 부분으로 욕구가 존재한다. 이성은 지혜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이성이 기개와 욕구를 잘 이끌어 욕구에 동요되지 않고 참된 이상을 잘 지켜나갈 때 지혜의 덕이 성취된다. 욕구는 절제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이는 한계와 정도를 지켜서 영혼의 다른 부분을 침해하지 않을 때 절제의 덕이 성취된다. 기개는 용기의 덕을 지닐 수 있으며 성급한 행동을 피하고 공격과 수비의 행위에서 적절한 힘을 발휘할 때 용기의 덕을 갖추게 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세 가지 부분들이 자신의 특수한 기능을 잘 수행하여 내적조화를 성취할 때, 네 번째 덕인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혼의 덕과 정의에 대한 입장은 이상국가를 구성하는 통치자와 전사 그리고 생산자에게 적용될 수 있다.

 

먼저 통치자는 이성이 지닌 지혜의 덕을 지녀야 하며 오랜 기간의 교육을 통해 이 능력을 실현시켜 좋음의 이데아를 직관하게 된 철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수호자는 기계가 지닌 용기의 덕을 지녀야하고 재산과 부인을 공동으로 소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용기는 두려워해야 할 것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아는 것이기에 전사들은 결코 가난이나 빼앗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생산자인 기술자와 장인은 욕구가 지닌 절제의 덕을 지녀야 하며 자신의 본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절제의 덕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정리하자면, 한 국가가 정의로운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지혜의 덕을 갖춘 통치자가 있어야 하고 용기를 갖춘 전사계급이 있어야 하고 절제를 갖춘 생산자 계급이 자신의 직분을 배정받고서 자신의 직분을 최대한 잘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통치자와 수호자 그리고 생산자가 각자에 맞는 영혼의 덕 갖춰 정의로울 때, 국가도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의 정의관은 응징적, 공리주의적, 법률주의적 성격을 띄고 있는 외재적 정의관에서 탈피하여,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의 정의로움에 초점을 맞춘 내재적 정의관을 내세웠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써 좋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도 좋은 것을 올바름으로 봄으로써, 내재적 정의관과 외재적 정의관을 총제적인 시각에서 조화롭게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적주의) 정의관 비교

 

플라톤은 개인의 영혼이 조화롭지 않을 경우 불행하며,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국가>에서의 정의관에 의하면, 플라톤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자(예를 들어 히틀러같은 경우)는 불쌍하며 영혼에 병이 든 사람이므로 영혼의 치료를 받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정의관은 공포를 통한 응징적 재제가 없다는 점에서, 불의에 대한 대응책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플라톤의 선의 이데아에 대해 비판한다. 수학적 정답처럼 선의 세계가 규정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doxa의 영역은 인간이 사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결단은 잘못될 수 있고 반례가 가능 하므로 잠정적인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국가를, 각자의 필요에 의해 형성된 것이며 각자가 맡은 바에서 최선을 다하여 돕는 나라가 올바른 나라라고 보았다. 즉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잘 발휘 할 수 있는 곳에서 각자가 자신의 일을 할 때 질서와 조화, 생산력이 극대화된다고 보는 것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의로운 사회는 모두가 합당한 몫을 받는 사회이며, 사회의 구조 내에서 자기의 고유한 지위를 할당받은 사람은 자신의 응분의 몫을 받은 사람이 된다. 이렇게 해서 정의로운 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 5권에서 분배적 정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국가가 비례에 따른 되갚음에 의해 존립한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분배 받아야 할 사람을 각각 A, B라 하고, 이들의 가치에 따른 분배의 몫을 각각 C,D라고 할 때 가치에 비례한 공정한 분배란 A:B=C:D로 표시될 수 있다. 이러한 분배가 공정한 이유는 A+C:B+D=A:B라는 등식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분배될 수 있는 재화의 총 몫이 10이고 AB의 기여도가 각각 23이라면, 그에 상응하는 몫은 비례에 따른 분배 원칙에 따라 46이 되는 것이다. , 악을 악으로 되갚고 선을 선으로 되갚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국가 성원들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교환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희랍전통의 정의관을 수정. 보완하여, 받은 만큼 되돌려주되 무조건적이 아닌 비례적으로 되돌려 줄 것을 주장한다. 그 비례의 기준은 사회적 지위, 그리고 교환의 자발성의 여부이다. 사회적 지위에 따라 보은, 보원이 차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볼 때, 비례적 정의는 폴리스적 질서 유지의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공적주의 정의론으로도 바라 볼 수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공적주의가 각자가 자신의 것을 갖고 행함혹은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는 것을 의미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것으로 행함과 각자의 것을 주는 것을 통해 정의가 실현되며 그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는 부정의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란 옳은 사람(비례를 따라서 균등하게 나누어 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선택에 의해여 옳은 일을 하게 하는 덕이며, 부정의란 유익한 것 또는 유해한 것의 비례에 어긋나는 과다 또는 과소이다. 이중, 과다(너무 많이 가지는 것)는 부정을 행하는 것이며, 과소(너무 적게 가지는 것)는 부정을 당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보상, 응징의 개념체계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플라톤의 정의론보다 현실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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