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
심신문제는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이것은 우리의 심성과 물리적 특질간의 관계,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 이해 가능하게 하는 문제다. (믿음과 욕구가 어떻게 해서 그토록 미세한 신경 세포들을 자극하느냐?) 근본적으로 이것은 물리 세계 내에서 마음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는 문제가 된다. 과연 우리의 마음은 물리적인 세계 안에 위치하는가?
심신 수반: 모든 물리적 속성들이 똑같은 두 사물(대상, 사건, 유기체, 사람 등)들이 심적 속성에서도 다를 수 없다면 심적인 것은 물리적인 것에 수반한다. 즉 물리적 식별 불가능성은 심리적 식별 불가능성을 필함(entail)한다. 즉 생물이 물리적으로 동일하면서 심리적으로 다를 수는 없다.(그 역은 성립하지만) (수반관계는 엄밀히 말하면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이 어떻게 공변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 非물리적 영혼이나 실체로서의 마음을 주장하는 이론과는 양립 불가능하다.(p. 27)
이는 반 데카르트 원리로 정리될 수도 있다. “순전히 심적인 존재란 있을 수 없다. 즉 물리적 속성을 갖지 않고서는, 따라서 물체가 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심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심신 의존: 임의의 대상이 어떠한 심적 속성들을 갖는지는 그것이 어떠한 물리적 속성들을 갖느냐에 의존하고 그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즉 한 대상의 심적 성격은 그것의 물리적 성격에 의해서 전적으로 결정된다.
- 심신 수반 원리를 함축
- 심적인 것에 대한 물리적인 것의 존재론적인 우월성 혹은 우선성을 긍정함. 심적인 것이 물리적인 것에 의해 설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둠.
최소 물리주의(minimal physicalism)을 규정하는 세 가지 원리
- 심물 수반, 反데카르트적 원리, 심물 의존.
세 원리를 모두 받아들이면 물리주의자가 된다. 반면 하나라도 거부하면 시공간의 세계 안에 물리적이지 아니한 대상이 있다고 인정하거나, 적어도 이 세계에 있는 일부 대상들은 그것들의 물리적 성질에 의존하지 않는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심적 현상의 종류
감각, 믿음, 욕구, 느낌, 정서 등
심적인 것의 특징
(1) 인식론적 기준
1) 직접적 지식
심적인 것에 대해서만 직접적 지식을 갖는가? 내 앞에 흰 종이가 한 장 있다라든지 내 방 밖에 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것도 마찬가지의 방식에 의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2) 私密性, 또는 일인칭적 특권
위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가능한 기준. 임의의 심적 사건에 대해서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그 심적 사건이 발생한 사람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당신이 벽에 붉고 둥근 색점이 있다는 것을 직접 알 수 있다면, 그 벽과 적당한 거리에 서 있는 나나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붉고 둥근 색점에 대해서 특권적인 인식적 근접성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적 사건들에 관한 지식은 당사자와 제삼자 사이에 비대칭성을 드러내지만 물리적 상태에 대한 지식은 그렇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비대칭성은 현재의 심적 사건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만 성립하지 과거의 심적 사건에 관한 지식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3) 오류 불가능성과 자기 告示成
심성과 관련되는 또 다른 인식적 특징으로서, 각 사람이 자신의 현재 심적 상태에 관해서 가지는 지식은 오류 불가능(infallible)하거나 교정 불가능(incorrigible)하며, 또한 자기 고시적(self-intimating)이라는 점을 들기도 한다. 물리적 사건의 경우 이러한 속성을 지니지 않는다.
자기 고시성이란 오류 불가능성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m을 상태나 사건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할 때, m이 발생하면 필연적으로 m의 발생을 믿는 사람이 있을 경우 그 m은 이 사람에 대해서 자기 고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고통의 특성들 중에는 내가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내성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들이다.
(2) 비공간적인 것으로서의 심성
데카르트는 심적인 것의 본질을 사유로, 물리적인 것의 본질은 공간성으로 규정하였다.
심성 개념이 심성을 가진 대상이 공간적으로 연장성을 갖는 물체여야 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M이 심적 속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대상 S가 M을 가진다는 명제는 S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러면 수라든지 명제와 같은 추상적인 대상들은 어떠한가? 수를 비롯한 추상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위의 기준을 수정할 수 있다. “추상적인 대상이 아닌 x가 속성 M을 가진다라는 명제로부터 x가 공간적으로 연장되어 있다라는 결론이 논리적으로 추론되지 않을 경우에만 M은 심적 속성이 된다.” 그런데 심적인 것의 특징에 대한 이와 같은 일반적인 접근법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이 접근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심적 실체 개념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심적 속성들이 빗물질적인 존재, 즉 공간적인 연장성을 가지지 않는 존재에 의해서 예화되는 가능 세계의 존재를 허용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당신이 마음을 순수한 심적 실체로 간주하는 데카르트의 입장이 싫을 경우에는 심성의 기준으로서 비공간성을 제시하는 방식에 대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심성의 기준으로서의 지향성
가령 우리가 x를 발로 차기 위해서는 x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가 x를 믿는다고 해서 x가 반드시 존재할 필요는 없다. 브렌타노는 심성의 이러한 특징을 심적 현상의 "지향적 내재(intentional inexistence)"라고 부르면서 이것이 바로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고 했다.
심적 상태들은 어떤 대상이나 내용을 가지거나 그것을 형하여 있으며, 그 대상이나 내용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심적인 것의 특징을 지향성이라고 불러 왔다. 지향성 개념은 지칭적 지향성과 내용 지향성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지칭적 지향성은 우리의 생각, 믿음, 의도 등의 지칭이나 대상성과 관련된 개념이다. 내용 지향성은 믿음, 희망, 의도와 같이 중요한 심적 상태들이 완전한 문장에 의해서 표현되는 내용이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지향성을 심적인 것의 특징이라고 했을 때 다음 두 가지 어려움이 있게 된다.
1. 어떤 심적 현상들-특히 고통이나 간지러움과 같은 감각들-은 두 종류의 지향성 중 어느것도 나타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p. 46
2. 심적 상태만이 지향성을 표출하는 유일무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런던”은 런던을 지칭한다. 물리적인 종목과 상태들도 지칭할 수 있고, 내용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떻게 지향성을 심성만이 가지는 배타적인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이에 대해 가능한 두 가지 답변
1. 우리의 마음과 심적 상태가 가지는 진정한(고유한) 지향성과 타고나면서 지향성을 결여한 대상과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귀속시키는 가장된(파생된) 지향성을 구별할 수 있다. “런던이 넓다”라는 문장은, 한글 사용자들이 이 문장을 사용해서 그 사태를 표상하기 때문에, 그것이 표상하는 사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가장된 지향성을 지닌다. 그렇다면 결국 언어의 지향성은 언어 사용자들과 그들의 심적 과정이 지니는 지향성에 의존하고 이것으로부터 도출된다. 이 후자의 지향성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도출되거나 빌려 온 것이 아닌 본래적인 지향성인 것이다.
2. 어떤 물리적인 시스템이 사물을 지칭하고, 사태를 표상하며,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 한에서는 그것이 심성을 표출하는 것으로 간두되어야 하고,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 시스템을 다루어야 한다.
(4) 해결되지 않은 난제
심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다양하고 통일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가 심적이라고 분류하는 사물들과 상태가 매우 다양하고 잡다할 수 있다는 점을 함축한다. 흔히 심적인 현상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한 부류는 감각적인 상태나 질적인 상태(감각질)로서 통증이라든지 시각, 촉각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 다른 부류는 지향적 상태인데 믿음, 욕구, 의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또 다른 부류는 지향적 상태인데 믿음, 욕구, 의도, 등이 여기에 들어간다. 전자는 심적인 것의 인식적 기준(즉, 직접적 근접성, 사밀성 등)을 만족시키는 전형적인 경우이고ㅡ 후자는 지향성 기준을 만족시키는 심적 상태의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답을 얻지 못한 물음이 하나 남아 있다. 그것은, 감각적 상태와 지향적 상태가 심적인 것이 되게 해주는 공통의 속성이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만족스러운 답변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단일한 심성 개념을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
2. 행동으로서의 마음: 행동주의
“심리학은 .... 순전히 객관적이고 경험적인 자연 과학의 한 영역이다. 그것의 이론적인 목표는 행동을 예측하고 제어하는 것이다.” by J. B. Watson
철학적 행동주의는 행동이 심성을 구성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어떤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적합한 패턴의 관찰 가능한 행동을 표출하거나 표출하는 성향을 갖는 것의 문제라고 본다.
1. 데카르트적인 개념에 대한 반동
심성에 관한 전통적인(데카르트적) 개념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심적 상태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직접적이고 확실한 반면에, 다른 사람의 심적 상태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간접적이다. 그리고 이 간접적인 지식은 관찰 가능한 물리적인 증거와 행동상의 증거로부터 추론에 의해서 얻게 된다. 그러나 많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은 심성에 대한 이러한 견해로부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과들이 나오게 된다고 생각해 왔다.
문제점
1.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해서 전혀 알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사자만이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을 뿐이고, 타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당사자의 행동과 말뿐이다. 그러면 그가 내면의 심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픔”과 같은 표현들이 간주간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을 단일한 주체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의 사적 극장으로 이해하는 데카르트적인 모델이 거짓임이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행동주의는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관점이 함축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의 반동이다. 행동주의는 우리의 심적 표현들의 의미가 단일한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는 사적인 내면의 사건과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관한 공적으로 접근 가능하고 간주관적으로 검증 가능한 조건과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한다. 심적 표현들의 의미는 사적인 마음 안에 있는 내면의 사건들이 아니라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행동에 관한 사실에 준거해서 설명된다고 한다.
2. 행동이란 무엇인가?
행동은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신체적인 사건과 조건이고, “내면적인” 정신 현상의 특징으로 여겨졌던 종류의 일인칭적인 인식적 근접성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3. 논리적 행동주의: 헴펠의 논변
“심리 상태를 서술하는 진술의 의미는 사람과 동물이 표출하는 특징적인 물리적 반응 양식을 서술한 것을 축약하는 기능에 있다.” by Hempel.
논리적 행동주의 1: 심적 현상들을 서술하는 유의미한 심리 진술은 어떠한 것이든지 오직 행동적인 현상과 물리적인 현상만을 서술하는 진술로 번역될 수 있다.
이 진술은 모든 유의미한 심리적인 표현들을 행동주의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는 논제로 좀더 넓게 공식화할 수 있다.
논리적 행동주의 2: 모든 유의미한 심리적인 표현은 행동적이고 물리적인 표현들, 즉 행동적인 현상과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표현들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헴펠은 다음과 같은 논증을 제시한다.
(1) 임의의 유의미한 진술의 내용이나 의미는 그 진술이 참이 되기 위해서 검증되어야 하는 조건들(검증조건)과 같다. - 검증주의적 의미 기준
(2) 한 진술이 간주관적인 내용, 즉 서로 다른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의미를 가진다면, 그 진술의 검증 조건들은 공적으로 관찰 가능하여야 한다.
(3) 오직 행동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들만이 공적으로 관찰 가능하다.
(4) 그러므로 유의미한 심리적인 진술의 내용은 공적으로 관찰 가능한 검증 조건들을 서술하는 진술들로 명기될 수 있어야 한다.
=> 심리적인 표현들이 간주관적인 의미를 가지는 한, 그 표현들은 행동에 관한 표현들과 물리적인 표현들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어야 한다.
4. 헴펠에 의해 제시된 행동주의적 번역의 가능한 후보들
번역 대상인 문장: “철수는 치통을 앓고 있다”
(a) 철수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러이러한 종류의 몸짓을 하고 있다.
(b) "무슨 일이냐?”라는 질문을 받자 철수는 “내가 치통을 앓고 있어”라고 말한다.
(c) 면면히 검진해 본 결과 치수가 드러난 충치가 발견되었다.
(d) 철수의 혈압, 소화 과정, 반응 속도가 어떠어떠한 변화를 보여주었다.
(e) 철수의 중추 신경계 안에서 이러저러한 과정이 발생하였다.
번역이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의미”를 보전하여야 하는 한에서는 (c), (d)와 (e)를 실격시켜야 한다.
(b)는 언어적 행동과 치통을 연결시킨다. 그러나 심리적인 것을 전제한다. 철수의 반응이 여기서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철수가 한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대인적인 의사 소통을 위해서 능숙하게 사용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세련된 심리적인 능력이다. 더욱이 철수가 치통을 앓고 있는 것이 전제될 경우 철수가 진리를 말하기를 원할 때에만 (b)에서 언급된 방식으로 그가 반응할 것이다. 그런데 “원함”은 심리적인 표현이다.
5. 행동주의적 번역의 난점
상위의 인지 상태를 특정한 행동 패턴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렵다. 가령 사람이 최대 소수란 없다고 믿을 때, 그들에 의해서 표출되는 독특한 신체적인 행동의 영역이 있을까? 또 이 영역을 느슨하게나마 정의할 수 있을까? 이러한 믿음들과 상호 관련을 맺는 신체 행동들을 찾는다는 생각은 확실히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언어적 행동-일정한 방식으로 자극받을 때에 그것에 적합한 언어적인 반응을 산출하는 성향-에 호소하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S는 p를 믿는다 =df S가 “p가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S는 “그렇다, p는 사실이다”라고 답할 것이다.
여기서 정의항은 S의 성향적 속성을 서술한다. 즉 S는 특정한 조건하에서 적합한 종류의 행동을 산출하는 성향을 갖는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앞의 정의가 행동주의적인 정의로서 얼마나 잘 작용할까? 이 정의는 심각한 난점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1. 헴펠의 예에서 봤듯이, 그 정의는 당사자가 “p가 사실인가?”라는 물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런데 이해라는 것은 심리적인 개념이며, 이것이 인정될 경우 위에서 제안된 정의는 우리가 “언어를 이해함”을 먼저 행동주의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한 행동주의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정의의 후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렇다, p는 사실이다”라는 말을 할 때, S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여야 하고, 그의 말을 듣는 사람이 그가 의도하는 의미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도록 그 말을 하여야 한다. 무엇을 말한다든지, 무언가를 의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발언하는 것은 곧 그 주체에 관해서 실질적으로 심리적인 전제를 다는 행위가 된다.
2. S가 “p가 사실인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S가 진리를 말하기를 원할 때에만 올바르게 답변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S가 진리를 말하기 원한다면”이라는 조건이 정의항의 전건에 추가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그 정의의 행동주의적 성격이 위협받게 된다. p에 대한 믿음은, 우리가 그 믿음과 일정한 욕구를 연결시킬 때에만, p를 표현하는 문장이 발언되게 한다. 이 점을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행동이나 행위는 단일하고 고립된 심적 상태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복합적인 심적 상태들로부터만 나온다. 따라서 우리가 욕구-믿음-행위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욕구를 정의항에 넣지 않고서 믿음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우리는 심적 상태와 행동간의 관계가 매우 복잡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음과 행동의 연관성은 언제나 파기 가능(defeasible)하며, 단지 물리적인 장애물이나 방해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심적 상태가 발생함으로써 파기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각각의 심적 표현에 대해서 순전히 행동주의적이고 물리주의적인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은 별로 성공할 가망이 없게 된다.
6. 심적 상태가 필함하는 행동에는 어떠한 종류가 있는가?
7. 고통은 고통 행동을 필함하는가?
필함관계란?
-> 고통이 움츠림과 신음을 “필함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누구든지 움츠리고 신음한다”는 명제가 분석적으로, 또는 개념적으로 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고통은 고통 행동을 필함하는가? 퍼트남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떤 철인은 고통 행동을 완벽하고 철저히 억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박: 그 철인이 고통 행동을 실제로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고통 행동을 드러내는 성향이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그들은 외적으로 고통 행동을 표출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의 필함 관계의 주장을 실제의 행동이 아니라 행동 성향에 의해서 구성하게 되면 최고의 스파르타 사람을 가상함으로써 만든 반론이 효력을 잃게 된다.
수정된 필함 관계 논제: 고통중에 있는 생물체는 누구든지 움츠리는 성향이나 신음하는 성향을 가진다는 것은 분석적 개념적 진리다.
반박: 이 논제로부터 우리는 성대가 없는 생물체는 고통중에 있을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이는 부당하다.
“어떠한 행동 유형이든지간에 그 유형의 행동을 산출하기에 물리적으로 부적합하지만 고통을 느깔 수 있는 생물체를 생각해 낼 수 있으며, 이 생각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다.”
=> 고통이 필함하는 행동 유형은 없다. 일반화하면 어떠한 행동 유형도 심적 상태에 의해 필함되지 않는다.
8. 존재론적 행동주의
논리적 행동주의는 심리적인 표현의 의미에 관한 이론이었다. 모든 심리적인 표현의 의미는 행동주의적이거나 물리주의적인 표현에 의해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론의 요지다.
그러나 우리는 심리적인 상태나 현상을 서술하는 언어와는 상관없이 그러한 상태나 현상들 자체에 관한 행동주의적인 논제를 고려할 수 있다.
-> 행동으로 나타난 사실 이외의 심리적인 사실이란 없다. 그리고 실제적이고 가능한 행동 이외의 심리적인 상태나 사건이란 없다.
논리적 행동주의는 존재론적 행동주의를 필함하지 않고, 존재론적 행동주의는 논리적 행동주의를 필함하지 않는다. 우리는 번개가 대기중에서 일어나는 전기 방전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번개”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전기 방전”이라는 표현들은 의미론적으로 관련이 없으며, 뜻이 같지도 않다.
9. 고통과 고통 행동간의 관계는 참된 관계인가?
확실히 고통 행동들은 우리의 고통 개념과 깊은 관계가 있다.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의 개념이나 의미를 행동 외에 달리 어떻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가? 고통과 고통에 특유한 행동간의 연관성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통의 개념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고통과 고통 행동간의 밀접한 관계를 분석적인 필함 관계로 만들지 않고서도 긍정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표준 미터기를 미터의 “정의”나 “기준”이라고 말한다. 이 둘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1미터의 길이라는 속성을 그 속성이 맺고 있는 우연적인 관계를 사용해서 규정한다는 것이 답이다. 이와 유사한 설명이 고통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고통에 관한 우연적인 사실, 이를테면 고통은 움츠림과 신음을 유발시킨다와 같은 사실에 준거해서 고통이 무엇인지를 규정한다. 이것은 이 세계에 관한 하나의 우연적인 사실이다. 이 설명은 고통과 고통 행동간의 관계를 우연적인 관계가 되게 하지만, 고통이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데에 고통 행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한다. 그리고 이 설명은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을 비롯하여 감각을 가리키는 심적인 표현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방식과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된다.
10. 방법론적 행동주의
심리학이 과학으로서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에 관한 지침으로서의 행동주의를 “방법론적 행동주의”라고 부른다. 방법론적 행동주의의 주된 신조는 무엇인가?
(1) 심리학의 자료로서 허용될 수 있는 자료는 오직 행동으로 나타난 자료-즉 생물체의 관찰 가능한 행동에 관한 자료-밖에 없다.
여기서 “자료”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료는 과학에서 두 가지 서로 연관된 목적에 이바지 한다.
1. 자료는 이론이 설명하고 예측하려고 하는 현상들의 영역을 구성한다.
2. 자료는 이론을 지지하거나 손상시킬 수 있는 증거의 기반을 이룬다.
일부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심리학의 자료가 관찰 가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주된 이유는 심리학 이론의 객관적인 검증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1)로 하여금 방법론적 행동주의의 한 형식이 되게 해주는 점은, 그것이 의식을 심리학적인 설명의 영역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이다.
(2) 심리학의 이론들은 피험자의 내면 상태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즉 심리학적인 설명은 생물체의 내면 상태에 호소해서는 안 되며, 행동에 관한 예측을 도출할 때 그러한 상태에 준거해서도 안 된다.
이 원리대로 하자면, 생물체의 내적인 구조는 영원히 심리학적인 탐구 대상이 될 수 없는 블랙 박스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인 일반화는 출력으로서의 행동상의 반응과 입력으로서의 관찰 가능한 자극 조건을 서로 연결시켜야만 한다. 그렇다면 동일한 자극이 가해졌지만 행동상의 반응이 서로 다른 경우는 내적인 구조에 호소하지 않고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는 두 생물체가 가지고 있는 강화(reinforcement)의 來歷이 서로 차이가 나는 데에 기인하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산출된 행동상의 차이가 지금 여기에서 그러한 내적 상태의 차이를 직접 함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여하튼 출력된 행동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과거 내력의 차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내적인 차이에 호소해서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또한 (2)는 생물체의 내적인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상태에 준거하는 것조차도 불법으로 만든다.(?)
이러한 점을 비추어서, 우리는 심리학의 방법론으로서의 행동주의를 다음과 같이 재규정할 수 있겠다.
(3) 심리학의 이론들은 심리학적인 설명을 제시할 때 내적인 심적 상태에 준거하지 말아야 한다. (3)을 채택하는 주된 이론적인 근거는 이론이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하여야 하며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자료들에 대해서 공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3)이 심리학의 이론으로부터 사적이고 의식적인 상태를 배제할 때, (3)은 그러한 상태들이 행동에 관하여 어떠한 인과적 및 설명적인 역할도 발휘하지 못하게끔 한다.
3. 두뇌로서의 마음: 심신 동일론
“사람들에게 당신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머리를 가리킬 것이다. 이는 그들의 마음의 소재는 두뇌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마음과 두뇌가 동일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여기서 마음과 두뇌가 동일하다는 이론, 즉 심성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구조와 복잡성을 지니고서 작동하는 두뇌를 가진다는 것과 같다는 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1. 마음과 두뇌의 상관 관계
심신 사건과 두되 과정 사이에는 포괄적이고 넓은 상관 관계가 체계적으로 성립한다. 우리는 이를 경험적인 증거에 의해 안다.
심신 상관 관계 논제: 임의의 생물체 O에게 일어나는 심적 사건의 유형 M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두뇌 상태의 종류 B(M의 “신경 상관자”)가 존재한다: M이 t시점에서 O에게 일어나기 위한 필요 충분 조건은 B가 t시점에서 O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논제에 따르면, 각 생물체에 대해서, 그 생물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심적 상태를 포함하는 심신 상관 관계들의 집합이 있다.
이러한 심신 상관 관계에 대해서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주목하는 것이 좋겠다.
(1) 심신 상관 관계는 “擬似 법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신경 섬유들 중 일부가 활성화되면 이 통증이 경험된다는 사실은 우연한 동시 발생이 아니라 법칙적인 규칙성의 문제다.
(2) 당신의 두뇌 상태가 특정하게 변화되지 않는 한, 당신의 심적 상태는 조그만 변화도 생길 수 없다. 바꿔 말해서, 두 개의 의식적인 심적 상태들 사이에 차이가 있는 곳에는 틀림없이 그것에 상응하는 두 개의 신경 상태 사이에 차이가 있다.
이 사항들을 달리 표현하면, 심성은 두뇌 상태에 수반한다라고 말하고, 이 수반은 일종의 법칙으로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는 선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과학이 마음과 두뇌 사이의 수반 관계를 더욱 더 드러낼 것이다.
2. 심신 상관 관계에 대한 설명: 심신 이론들
마음과 두뇌가 상관 관계를 밎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이 그러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것들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공통의 과거 원인을 갖는 것인가? 즉 그것들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둘을 동일한 심층적인 과정의 두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인가? 아미면 이둘은 동일성 관계에 있는 것인가?
(1) 안과적 상호 작용론
데카르트는 심신간의 인과적 상호 작용이 송과선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였다. 송과선 주위를 흐르는 극도로 미세한 입자들로 이루어진 유동체인 “동물 정기들”이 송과선을 다양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 송과선의 운동이 마음의 의식 상태를 일으킨다고 보았다. 역으로 마음이 송과선을 다양하게 움직여서 주변의 동물 정기들의 흐름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다시금 몸의 각 부분들에 영향을 주어서 궁극적으로는 생리적인 변화와 신체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2) 심신간의 “예정 조화”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아침에 시계 가게 주인이 맞춰 놓은 시계들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신에 의해서 미리 조화를 이루도록 맞춰져 있다고 보았다.
(3) 기회인론
말블랑슈는 심신 사이의 인과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은 인간의 착각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정신인 “유한 정신”과 신체 사이에는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없다고 보았다. 이는 신의 역할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고 보았다.
(4) 양면 이론(Double-aspect Theory)
스피노자는 마음과 몸은 단일한 실체의 상호 관련된 두 측면들에 지나지 않으며, 이 실체는 정신적이지도 않고, 물리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하였다. 즉 몸과 마음은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가 지닌 두 개의 구별되는 측면들이다.
(5) 부수 현상론
이 이론에 따르면, 모든 심적 사건은 두뇌에 있는 물리적 사건에 의해서 일어나지만, 심적 사건은 그 나름대로의 인과력을 전혀 갖지 못하고 인과 연쇄의 최종점만 될 수 있을 뿐이다. 모든 심적 사건들은 우리의 두뇌에서 진행되는 생리적인 과정의 결과이자만, 다른 어떠한 것도 발생시키지 못한다.
(6) 심신 동일론(또는 심물 동일론)
이 이론에 따르면, 심적 상태 및 사건과 두뇌에서의 물리적 과정은 동일하다. 비론 "고통"과 “C-신경 섬유의 작동”이라는 표현들은 의미가 같지 않지만, 그것들은 같은 현상을 가리키고, 고통이란 다름아닌 C-신경 섬유의 작동이라는 것이 판명된다고 주장한다.
(7) 창발론
심물 상관 관계는 더 이상 설명될 수 없고 세계에 관한 근본적인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3. 심적인 것과 신경적인 것간의 동일성 논변
스마트는 심신 동일론을 받아들이기 위한 근거로서 단순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단순성과 간결성을 고려한다고 해서 심적인 것과 신경적인 것의 동일성이 지지된다고 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1) x=y 를 주장한다는 것은 단 하나의 것만 있지 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고통이 그것의 신경 상관자와 동일하다면, C-신경 섬유의 작동 이외의 고통은 없게 된다. 동일론이 우리의 존재론을 단순하게 만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다.
(2) 심적인 것과 신경적인 것을 동일시하면 개념적인 단순성, 또는 언어적인 단순성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올 수 있다. 심적인 것과 신경적인 것을 동일시하면 심리 언어가 물리 언어에 의해서 원리상 대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심리 언어는 이론적으로 없어도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창발론자에 따르면, 심물 상관 관계는 법칙적인 부수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창발론적인 접근법대로 하자면, 우리는 이러한 부수적인 법칙들을 맹몸적이고 설명될 수 없는 법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 이유는,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들이 알맞게 단순하여야 하는데 이러한 심물 상관 관계들은 물리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수많은 세포와 분자와 미립자들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욱 근본적인 법칙들로부터 심물 법칙이 도출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어떤 식으로 도출되든지간에 적어도 그 전제들 중 하나는 심적인 상태를 가리켜야만 하고 그 심적 상태를 물리적인 상태와 짝지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한퇴행에 빠진다. 동일론에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4. (심신 동일성을 위한) 암스트롱의 논변
핵심 아이디어
* 유전자=DNA 분자
1. 우선 “유전자”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즉 유전자 개념을 가져야 한다. 유전자란 유전적인 특성들을 전이시키는 데 인과적인 책임이 있는, 유기체 내의 요소이다. 여기서 유전자는 그것의 인과적인 기능이나 역할에 의해서 정의되었다.
2. 분자 생물학자들이 경험적인 연구를 통해 발견해 낸 바에 의하면, DNA 분자가 이 인과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3. 따라서 유전자=DNA 분자
* 고통=C-신경 섬유의 작동
1. 고통의 개념= 생체 조직의 손상으로 인해서 정상적으로 생겨나고 전형적으로 움츠림과 신음과 같은 행동을 일으키는 내적 상태.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들에 관한 선험적인 사실이다.
2. C-신경 섬유의 작동이 보통 생체 조직의 손상으로 인해서 생겨나고 일반적으로 움츠림과 신음을 유발시키는 내적 상태라는 사실이 발견하였다.
3. 따라서 고통=C-신경 섬유의 작동
암스트롱의 논증에 대한 김재권의 비판
1. 고통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생체 조직의 손상에 의해서 발생하고 보통 움츠림과 신음을유발시키는 상태라는 개념과 정말 같은가? (2장 참고)
2. 신경 생리학의 경험적인 연구가 과연 이 논변에서 상정된 것처럼 간단하고 선명할까? 인간과 같은 심성을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생태와는 달리 단백질로 되어 있지 않고 심지어 유기적이지도 않은 “생물체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다수 실현(multiple realization)논변)
5. 심적 인과로부터의 논변
심적 인과란, 심적 사건을 포함하는 어떠한 인과 관계도 다 가리킨다. 가령 바늘이 당신 손을 찌르면, 그 격렬한 통증으로 인해서 당신은 손을 뺄 것이다. 이때 물리적 사건의 원인이 되는 심적 사건이 있게 된다. 심물 동일성이 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통은 물리적인 기초없이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이 C-신경 섬유의 작동과 법칙적으로 상관 관계를 맺는다고 전제하자. C-신경 섬유의 작동을 당신 손의 움직임의 원인으로서 간주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가? 통증과 손을 뒤로 빼는 것 사이의 인과 관계가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면, 통증과 C-신경 섬유의 작동 사이에 불변하는 상관 관계가 전제 될 경우 C-신경 섬유의 작동과 손 움직임을 연결짓는 법칙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손 움직임을 포함하는 인과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C-신경 섬유의 작동까지 연결되는 물리적인 사건들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러 사항들을 고려해 볼 때 C-신경섬유의 작동이 손의 움직임의 실제 원인이라고 보게 되지 통증이 그것의 원인으로 보게 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통증이 원인으로서의 역할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손쉬은 길은 통증과 C-신경 섬유의 작동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만약 통증을 손 움직임의 별개 원인이라고 한다면, 손의 움직임은 두 개의 구별된 원인들을 가지게 되고, 각 원인은 손을 움직이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 된다. 그러면 이 경우 인과적 중층 결정(overdetermination)의 경우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나의 물리적인 원인만으로도 충분히 손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통증이 수행하도록 요청되는 인과적인 역할은 아무것도 없다.
심물 동일성은 심적 인과성을 불가사의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해준다. 심적 인과성은 물리적인 인과성의 한 종류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기 때문이다.
6. “동일성”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동일자 식별 불가능성: X와 Y가 동일하다면, X와 Y는 모든 속성들을 공유한다.
식별 불가능성의 동일성: X와 Y가 모든 속성을 공유한다면, X와 Y는 동일하다.
동일론의 적대자들은 바로 이 마음과 몸을 “차별짓는 속성”을 찾아내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심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을 차별짓는 속성으로서 여러 가지 속성들을 제시해 왔다.
7.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 물리주의
동일론은 심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다고 하면서 “사건들”에 관해서 언급한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사건에 관한 관점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 번째 사건이론: 사건이란 물리적 대상들과 함께 이 세계를 이루는 기본적이고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건들도 물체들처럼 속성을 가지며 類 아래 포섭된다.
이제 동일론의 표준적인 형식을 살펴보자.
(1) 모든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
현재 검토하고 있는 사건 이론에 따르면, 이것은 다음의 (1a)와 같게 된다.
(1a) 개별자 물리주의: 어떤 심적 사건류(mental-event kind) 아래에 포섭되는 모든 사건은 또한 물리적 사건류(physical-event kind) 아래에 포섭된다(또는 심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건은 또한 어떤 물리적 속성을 가진다).
여기서 사건류는 사건의 “속성”에 관해서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봐도 된다. (1a)는 각각의 심적인 “사건 개별자”와 물리적인 “사건 개별자”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개별자 동일론(token-identity theory)"이라고도 불려진다. 사건 개별자(event token)는, '고통들’이나 ‘가려움들’과 같은 사건 유형(event type)이나 사건류(event kind)와 대비된다. 개별자 물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논제인 (1a)가 심적 유형과 물리적 유형간의 동일성을 필함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후자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유형 동일론(type-identity theory)"이라고 부르는데 다음과 같은 논제로 표현될 수 있다.
(1b) 유형 물리주의(Type physicalism): 심적 사건 유형과 물리적 사건 유형은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자면, 심적 속성들과 물리적 속성들은 동일하다.
“고통들은 C-신경 섬유의 자극과 동일하다”라는 문장은 한 유로서의 고통을 한 유로서의 C-신경 섬유의 자극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그 진술은 유형 동일론의 진술이고 그로 인해서 유형 물리주의에 속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심리-신경 동일론은 유형 물리주의로 해석되지 개별자 물리주의로 해석되지는 않는다.
두 번째 사건 개념(속성 예화 이론: property exemplification theory)
유형 물리주의로 하여금 동일론을 공식화해 주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만드는 (유일한) 사건 개념. 이 이론에 따르면, 하나의 사건은 한 시점에서 대상이 어떤 속성을 예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속성을 내가 예화하고 있음은 하나의 사건이다. 이 관점에 의하면, 사건 e와 e'이 “동일한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은 동일한 시점에서 단 하나의 대상이 동일한 속성을 예화한 것이어야 한다.
사건을 기본적이고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첫 번째 관점과는 달리, 이 관점은 사건을 속성과 대상과 시간으로 이루어진 구조화된 개체로 본다. 그래서 심적 사건은 한 시점에서 하나의 대상에 의한 심적 속성의 예화가 되며, 마찬가지로 물리적 사건은 물리적 속성의 예화가 된다.
속성 예화 이론에 따르면, 조지가 어느 시점에서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심적 사건과 C-신경 섬유가 자극된 상태에 있음이라는 물리적 사건이 동일하다면,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심적 속성이 C-신경 섬유가 자극된 상태에 있음이라는 물리적 속성과 동일하여야 한다. 그래서 사건 예화 이론을 따르면 개별적인 심적 사건과 개별적인 물리적 사건의 동일성으로부터 심적 속성과 물리적 속성간의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귀결되고, 개별자 물리주의와 유형 물리주의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된다.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신 수반 관계가 성립하지 않더라도 참이 될 수 있다. ... 그리고 당신과 분자 구조는 모두 같지만 의식은 전혀 없는 물리적인 복제물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곧 한 사건의 심적 속성들이 어떻게 물리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지 또는 물리적으로 설명되는지에 관해서 개별자 물리주의가 전혀 아무 말도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별자 물리주의는 일종의 비환원주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유형 물리주의는 일종의 “환원적 물리주의”로 여겨진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심적 실체라는 것은 없다는 결론을 필연적으로 함축한다.
유형 물리주의는 강력한 유물론이다.
8. 동일론에 대한 반론
(1) 인식론적 반론
“중세기의 농부들은 고통에 관해서는 잘 알지만 C-신경 섬유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고 두뇌에 관해서도 별로 알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통이 C-신경 섬유의 자극과 동일 할 수 있는가?”
(1) “중세기의 농부들은 고통에 관해서 무언가를 안다”
(2) “고통은 C-신경 섬유의 자극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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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따라서 중세기의 농부들은 C-신경 섬유의 자극에 관해서 무언가를 안다”
(2) 위치문제
어떤 철학자들은 두뇌 상태가 심적 상태와는 달리 공간상의 위치를 가지기 때문에 그 두 상태는 동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생각과 감각에 대응되는 두뇌 상관자들(brain correlates)이 어디서 발생하는지를 안다. 그러나 당신이 비행기를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갑자기 하였을 때 그 생각은 어디서 생기는가? 생각과 신경 상태가 동일하다고 이미 전제하지 않는 한, 생각의 위치를 그것의 신경 상관자가 발생하는 곳과 같다고 말하여야 할 이유가 없다. 달의 위상과 조수의 움직임이 상관 관계에 있다고 해서 조수의 움직임이 달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바로 생각, 욕구, 정서 등의 위치를 결정짓는 절차를 가지고 있지 않을 뿐이다.
위치의 문제를 다루는 다른 방법은 사건에 대한 속성 예화적 설명을 명시적으로 채택하는 것이다. 즉 철수가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속성을 오늘 정오에 예화시킴이 고통 사건의 한 예인데 이 고통의 위치는 철수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철수의 C-신경 섬유의 자극이 있는 위치가 된다. 처수의 고통과 그의 C-신경 섬유의 자극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그 두 사건이 동일한 사람에게서 일어난다는 전제로부터 귀결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3) 심적 사건의 현상적 속성들
동일론자들은 심적 사건의 심적인 특징들이나 현상적 속성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만일 세참이라는 속성을 지닌 고통이 있고, 고통이 두뇌 상태와 동일하다면, 어떤 두뇌 상태는 이 속성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두뇌 상태가 그런 속성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뜻도 없는 말이 된다.
가능한 답변
이 반론을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것은 우리가 개별자 물리주의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유형 물리주의자가 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반론은 개별자 물리주의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별자 물리주의자는 현상적 속성들을 포함해서 심적 속성들에 관해서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고, 단지 이러한 심적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사건들에 관해서만 언급하기 때문이다. 개별자 물리주의는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속성들과 완전히 구별되되 사건들은 이 두 종류의 속성들을 함께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리하고 세찬 고통이면서 C-신경 섬유의 자극인 사건이 있을 수 있다. 즉, 이 사건은 예리하고 세찬 고통임이라는 현상적 속성과 C-신경 섬유의 자극임이라는 생리적 속성을 함께 갖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건은 C-신경 섬유의 자극이면서 또한 예리하고 세차고 참을 수 없다”는 말이 다소 이상스럽게 들리기는 해도 무의미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아니라고 개별자 물리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유형 물리주의는 모든 심적 속성들을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개별 물리주의에서처럼 문제를 처리할 수 없다. 그러면 심적 사건들이 가지는 이러한 심적 특징들을 유형 물리주의자는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우리는 “예리한”, “세찬”, “오렌지색의 노란”을 심적 사건들을 규정짓는 별개의 현상적 속성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예리한”, “세찬”, “오렌지색의 노란 심상” 등을 심적 속성이나 사건류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하고서, 이러한 속성들을 그것들과 상관 관계를 가지는 두뇌 상태류들과 동일화시켜야 한다. 두뇌 상태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것은 오렌지색의 노란 시각 심상에 대한 경험이지, 시각 심상에 대한 오렌지색의 노란 경험은 아니다.
이 점은 속성 예화 이론 안에서 좀더 명료하게 서술될 수 있다. 우리가 당신의 예리하고 세찬 고통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당신이 t시점에서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사건을 예리하고 세차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예리하고 세찬 고통을 느끼고 있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예리한”, “세찬”과 같은 표현들은 고통의 개별적인 발생들을 수식하는 속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봐선 안 된다. 오히려 그 표현들은 고통스러워함이라는 속성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수숙하거나 한정함으로써 좀더 세밀하게 명시된 속성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이러한 속성들은 두뇌 상태류이며, 이것들은 좀더 넓은 두뇌 상태류(이 유는 고통스러운 상태에 있음과 동일하다) 아래에 포섭되는 하위의 유다. 그래서 예화되는 심적 속성은 오렌지색의 노란 잔상을 가짐(또는 경험함)이라는 속성이고, 이 속성은 하나의 물리적인(신경적인)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4) 현상적 속성에 대한 재고찰
동일론에 따르면, 세부적인 심물동일론은 과학적인 관찰과 이론적인 연구에 의해서 발견되는 경험적인 진리라고 한다. 그런데 "D1=D2"가 경험적인 진리라면, D1과 D2라는 두 이름, 또는 기술구들은 서로 독립적인 적용 기준들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동일성은 진위 여부가 선험적으로 알려질 수 있는 것이 되고 만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가려움이나 따끔거림이 아니라 고통이라고 골라내는 것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현상적 성질을 우리가 인지하기 때문이다. 만일 신경 생리학적인 기준에 의해서 고통이 골라진다면(가령 우리가 C-신경 섬유의 자극을 고통의 기준으로서 사용한다면), 고통과 신경 상태의 동일성은 경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 기준으로부터 고통 개념이 바로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심물 동일성의 경험적인 성격이 의미가 있으려면 우리가 현상적 속성들의 존재를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우리가 고통을 확인할 때 사용하는 기준인 아픈 느낌은 물리적 속성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직관에 부합한다.
개별자 물리주의자는 이 반론에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적 속성들을 환원 불가능한 심적 속성들로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형 물리주의자는 우리가 영락없이 심적인 특징들을 인지함으로써 심적 상태들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어야만 한다. 유형 물리주의자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경험이 지닌 질적인 현상적 특징을 인지함으로써 그 경험을 확인하되, 심적인 속성으로서의 현상적 속성들은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속성들과 동일하므로 그것들이 환원불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 만족스러운 답변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고통을 가려움이나 간지러움과 금방 구별한다. 그런데 만일 경험의 신경 생리학적인 특징에 의해서 경험들을 확인한다면 우리는 어느 신경 생리학적인 특징이 고통을 나타내고, 어느 특징이 가려움을 나타내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이에 대해 암스트롱과 스마트는 현상적 속성들을 가리키는 진술들을 그렇지 않은 진술들에 의해서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 암스트롱은 심적 상태에 대한 인과적 개념을 제시하고자 했다.(이는 앞에서 살펴봤다네...) 스마트는 “화제 중립적 번역”을 제시했다. 스마트의 논변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어니스트는 오렌지색의 노란 잔상을 경험하고 있다”라고 말할 때 이 보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화제 중립적인” 번역-화제 중립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보고되는 것이 심적인지 물리적인지에 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에 의해서 전달될 수 있다.
“어니스트가 정상적인 조명 아래에서 오렌지색의 노란 색점을 볼 때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에게서 일어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본다”가 그가 깨어 있음, 그의 눈이 열려져 있음, 그 색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등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스마트와 암스트롱 방법 대조
“어니스트가 그의 왼쪽 엄지손가락에서 예리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다”
[스마트] 바늘이 어니스트의 왼쪽엄지손가락에 박히고 그가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고 신음할 때 발생하는 것과 같은 것이 어니스트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암스트롱] 어니스트는 그의 왼쪽 엄지손가락에 박힌 바늘이 원인이 되는, 그리고 그로 하여금 자기 왼쪽 엄지손가락을 추켜들게 하는 원인이 되는 내적 생태에 있다.
암스트롱 번역도 화제 중립적이다.
그러나 과연 두 번역이 우리가 자신이 어떠한 종류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를 어떻게 확인하느냐는 문제를 만족스럽게 설명해 줄까? 당신이 “나는 내 왼쪽 엄지손가락에서 예리한 고통을 느낀다”라고 말함으로써 당신 자신의 경험을 보고할 때 스마트와 암스트롱의 번역한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가?
(5) “고정지시어”로서의 “고통”
유형 물리주의자들은 심신 동일성이 우연적인 것이지 필연적인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고통은 C-신경 섬유의 자극과 같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동일성 관계에 있는 “고통”과 “C-신경 섬유의 자극” 중 하나가 非고정지시어야 한다. 비고정지시어란 상이한 가능세계들에서 상이한 대상들을 지시할 수 있다. “C-신경 섬유의 자극”이라는 표현이 비고정적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어떻게 실제로 “C-신경 섬유의 자극”인 사건이 “C-신경 섬유의 자극”인 사건이 안 될 수 있겠는가? 스마트와 암스트롱의 접근법을 따르면 “고통”은 비고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암스트롱의 설명에 의하면, “고통”은 임의의 주어진 세계에서 특정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고통”을 이렇게 이해하면, 실제로 고통인 상태가 고통이 아니었을 수도 있게된다. 인과적 역할은 법칙들에 의존하고 법칙들은 세계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고통”이 인과적인 역할을 가리킨다면 그 표현은 고정적일 수 없다.
그러나 고통이 지니는 아픈 성격을 고통을 규정짓는 본질적인 속성으로 간주할 경우 암스트롱 식의 설명은 타당하지 않다. “고통”이 바로 그 아픈 성질을 가진 사건이나 상태를 고정적으로 지시하며, 그 표현은 모든 가능 세계를 통해서 그러한 종류의 사건을 가리키되, 그 사건이 임의의 세계에서 어떠한 인과적 역할을 수행하는지, 또는 물리적 사건이나 행동과 관련해서 인과적인 역할을 수행하든 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논의하고 있는 반론의 힘은 앞의 반론과 연관해서 논의된 심적 표현들에 대한 암스트롱과 스마트 식의 접근법이 타당하느냐에 달려 있다. 유형 물리주의자는 심신 동일성이 다른 이론적인 동일성처럼 경허먹인 근거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우연적이지 않고 필연적인 동일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6) 다수 실현 논변
유형 물리주의는 고통과 C-신경 섬유의 자극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 생물체가 C-신경 섬유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적절한 생물학적인 구조로 된 두뇌를 가지고 있지 않는 한, 그 생물체는 고통을 느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고통이 물리적 상태 C와 동일하다면, 고통은 실제의 생물체와 조직 체계 내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가능한 생물체와 조직 체계 내에서 C상태와 동일하여야 한다. 그렇지만 인간의 두뇌와 매우 다른 두뇌를 가지고 있으면서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생물체들이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 유형 물리주의자는 고통 상태에 있는 모든 종의 모든 생물체들에 공통적인 두뇌 상태를 좀더 추상화시키고 일반화시켜서 생리학적으로 서술할 수 있다고 답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매우 다양한 물리적 및 생물학적인 구조들 안에서 임의의 심적 상태가 “다수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하나의 심적 상태와 하나의 물리적 상태를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고통이 하나의 물리적 상태와 동일하다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물리적인 상태와 동일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생물체와 조직체 안에서 고통을 실현(예화, 실행)할 수 있는 물리적 상태들은 무한히 많이 있다. 그래서 심적 상태의 한 유형으로서의 고통은 신경적 상태 유형이나 다른 어떠한 물리적 상태 유형과도 동일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심신 동일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으로서 이전까지의 환원주의라는 용어가 누렸던 평판을 내리고 기능주의가 도래하는 계기가 된다.
4. 컴퓨터로서의 마음: 기계 기능주의
힐러리 퍼트남의 “심리적 술어들” 논문 발표 후
1. 마음-두뇌 동일론 몰락
2. 기능주의 탄생
3. 비환원주의의 입지 강화
이 모든 일들은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the multiple realizability of mental properties)이라는 한 가지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다.
1. 다수 실현 가능성과 심적인 것의 기능적 개념
천사처럼 지식과 믿음들을 가진 전적으로 非물질적인 존재가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전혀 없는 것 같다. 만일 믿음, 욕구, 정서들을 갖는 천사라는 관념이 일관적인 관념이라면, 이 사실은 심리적 상태들이 순수히 非물리적이고 전적으로 非물리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그 무엇도 심성의 관념 자체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심적 속성이 非물리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실질적인 형이상학적 논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한다.
[물리적 실현 원리] 만일 어떤 것 x가 시점 t에 어떤 심적 속성 M을 갖는다면 (혹은 심적 상태 M에 있다면), 그 경우 x는 물리적인 것이고-x는 t에 x안의 M을 실현하는 물리적 속성 P를 동시에 갖는다는 사실에 의하여- x는 t에 M을 갖는다.
비록 심성의 관념은 비물리적 실체들이 심적 특징을 갖는 것을 허용한다고 할지라도, 이 원리에 따르면, 세계는 오직 물리적 체계들만이 심적 속성들을 실현하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다. 더욱이 그 원리는 모든 심적 속성들이 물리적 기초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즉 마음들은, 만일 그것들이 존재한다면, 물리적으로 구현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심적 속성들의 다수 실현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것에 주목하라. 심적 속성 아픔은 인간의 경우 C-신경의 진동이 그것을 실현하지만, 다른 종들의 경우 아픔을 실현하는 생리적 메커니즘이 전혀 다를 수 있다. 또한 공상 과학에 나오는 로봇들처럼 믿음과 욕구, 심지어는 감각들도 가질 수 있는 전자 체계들이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심적 개념들에 대한 다음의 흥미로운 특징들을 지적하는 것 같다. 심적 개념들은, 주어진 한 체계 안아세 그것들을 실현하는 실제의 물리적/생물학적 메커니즘이나 구조들에 대한 어떤 제약 조건도 포함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적 개념들은 인공물의 개념들과 비슷하다. 하나의 물리적 장치가 어떤 명시된 역할, 즉 다양한 형태의 에너지를 기계적 힘이나 운동으로 변환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한 그것은 엔진으로 간주된다. 엔진의 개념은 한 역할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기술함으로써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고통의 역할은 무엇으로 기술되는가? 우리는 고통을 “조직-손상 감지기”의 역할 기술에 의해 명시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를 일반화하여 만약 마음이 컴퓨터와 같고, 심적 과정들이 기본적으로 계산 과정들이라면, 우리는 마음과 심적 과정들이 물리적으로 실행되는 방법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제약도 기대해선 안 된다. 마치 대단히 다양한 물리적 장치들이 동일한 계산적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듯이, 대단히 다양한 생물학적 혹은 물리적 구조들이 동일한 심리적 과정들을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철학자에 의하면, 이런 생각들은 물리적/생물학적 속성들과의 관계에서 심리적 속성들이 갖는 추상성 내지 형식성을 지시한다. 달리 말하면, 심리적 종류들은 그것들의 질료적 구성이나 메커니즘들에 관련된다기 보다는 사건과 과정들의 형식적 패턴이나 구조들에 관련되는 듯하다.
그러면 하나의 심적 유형에 관한 물리적으로 다양한 모든 사례들을 함께 묶어 주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고통들(인간의 고통들, 개의 고통들, 화성인의 아픔들 등등)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들을 고통이라는 단일한 심리적 종류로 분류하도록 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즉 심성 종류들의 개별화의 원리는 무엇인가?
유형 물리주의자의 답변: 모든 고통들을 고통의 사례를 만들어 주는 공통적 성질은 어떤 신경 생리적 속성의 예화이다. 즉 유형 물리주의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심적 종류는 하나의 물리적 종류이다.
행동주의자의 답변: 모든 고통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것은 어떤 행동적 속성이다.
기능주의자의 답변: 기능주의에 의하면, 심적 종류는 기능적 종류 혹은 인과적-기능적 종류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하는 “기능”이라는 것은 어떤 인과적 역할을 실행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하나의 고통으로 만드는 것은 어떤 세부적인 물리 화학적 구조나 메커니즘이 아니라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그것들의 능력이다. 고통의 개념은 그것의 기능에 의하여 정의된다. 여기서 관련된 기능은, 전형적인 고통의 입력(조직 손상, 외상)과 전형적인 고통의 출력(움츠리고, 신음하고, 피하는 행동 등) 사이의 인과적 매개자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즉 심적 종류들은 인과적-기능적 종류들이다. 그리고 한 심적 유형/종류의 모든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속성은, 그것들이 그 심적 유형에 고유한 어떤 인과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2.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둘 다 감각 입력과 행동 출력 - 혹은 “자극”과 “반응” -이 심성 개념의 중심적 요소라고 말한다. 그러나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들이 있다.
차이 1. 기능주의는 심적 상태를 인과력을 갖는 한 유기체의 실제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한다. 한 유기체가 고통 상태에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전형적으로 조직 손상에 의해 야기되며 또한 전형적으로 움츠리고 신음하고 피하는 행동들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행동주의는 현실적 혹은 가능적인 행동들을 가지고 심적 상태들을 신분 확인함에 있어서 심적 상태들과 관계하는 내적 상태들에 대한 언급을 삼간다. 그래서 행동주의자에게 있어서, 고통상태에 있다는 것은 움치리고 신음하거나 움츠리고 신음하려는 성향을 갖는 것이지만, 움츠림과 신음 소리를 야기하는 내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반면 기능주의는 내적 상태를 갖는다.
비록 행동주의와 기능주의가 모두 심적 상태들에 대하여 말하면서 “행동적 성향들”을 지칭할지라도, “성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다를 수 있다. 기능주의자는 성향에 대하여 “실재론자”의 접근을 취하는 반면, 행동주의자는 “도구주의자”의 노선을 따른다.
[도구주의자의 분석] <x는 물에 녹는 성향을 갖는다>는 <만일 x를 물에 담그면, x는 녹는다>로 정의된다.
[실재론자의 분석] <x는 물에 녹는 성향을 갖는다>는 <x는, 그것을 물에 담갔을 때 x를 녹도록 야기하는, 어떤 내적 상태 S에 있다>로 정의된다.
도구주의에 따르면, 수용성(성향성)은 ~~한다면 --하는 속성으로 판명된다. 반면 실재론에 따르면 수용성을 정언적/범주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하며, 여기서 그 내적 상태는 각설탕을 물에 넣었을 때 그것을 녹도록 만드는 인과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한다. 두 분석들 중 어느것도, 수용성을 갖기 위해 각설탕을 물에 담그거나 혹은 실제로 녹일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차이를 지닌다. 만일 x는 물에서 녹지만 y는 그렇지 않다면, 그러한 차이에 대해, 실재론자는 그것들이 미시 구조에서 다르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인과적 설명을 제공할 것이다. 도구주의자의 경우, 그 차이는 단지 주어진 사실일 뿐이다. 즉 “물에 담그면, 그것은 녹을 것이다”라는 조건문이 x에 대해서는 참이지만, y에 대해서는 참이 아니라는 것뿐이다. 그 차이는 x와 y 사이의 어떤 더 이상의 차이에도 근거하지 않는다.
심적 상태들을 행동적 성향이라고 말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실제적인 내적 상태로 간주한다. 반면, 행동주의자는 심적 상태를 단지 입력-출력 혹은 자극-반응의 상관 관계로 간주한다.
차이2. 기능주의와 행동주의 사이의 두 번째 차이는 심적 상태를 규정하는 “입력”과 “출력”이라는 말이 해석되는 방식에 있다. 행동주의자에게 입력과 출력은 모두 관찰 가능한 물리적 자극 조건들과 관찰 가능한 행동적 반응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기능주의자는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규정함에 있어서 그 이외의 다른 심적 상태들을 지칭하는 것을 포함한다. 한 심적 상태의 전형적인 원인과 결과들이 다른 심적 상태들을 포함할 수 있다는 것은 심적 상태에 대한 기능주의적 개념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방식으로 심적 특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기능주의자는 심적 실재론(mental realism)을 지지한다. 여기서 심적 상태들은 세계의 현상들의 인과적 구조 안에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본다. 행동주의자에게도, 심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이지만 오직 행동이나 행동적 성향들로서만 실재한다. 왜냐하면 행동주의자에겐 행동을 넘어서는 심적인 것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능주의에게 있어 하나의 심적 사건을 어떤 심적 사건의 종류로 만드는 것은, 그 사건이 다른 심적-사건 유형들 및 입력/출력 조건들과 인과적으로 연결되는 방식이다. 이들 다른 심적-사건 유형들은 각기 다른 심적 사건들과 입력/출력 사이의 인과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정체성을 갖기 때문에, 각 심적 유형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세계 전체에 의존한다. 기능주의에서는 욕구란 적절한 믿음과 함께 어떤 행동(출력)을 야기하는 내적 상태의 종류라는 것이 바로 욕구의 본질적 특징이 된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정의를 순환적으로 만들지 않는가? 만일 욕구의 개념이 믿음을 지칭함이 없이 정의될 수 없고, 믿음의 개념이 욕구를 지칭함이 없이 설명될 수 없다면, 어떻게 두 개념들이 이해될 수 있는가?
3. 튜링 기계들
기능주의는 원래 퍼트남이 “튜링 기계”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구성했던 이론이다.
4. 튜링 기계의 “물리적 실현”
심적 상태를 어떤 인과적 역할을 담당하는 상태로서 이해하는 기능주의의 관점과 물리적 상태가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를 실현한다는 아이디어 사이에는 명백한 수렴이 있다. 기능주의적 견해에 의하면, 하나의 주어진 심적 상태를 그 종류의 심적 상태로 만드는 것은 바로 감각적 입력과 행동적 출력 및 다른 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듯이, 마찬가지로 어떤 물리적 상태를 주어진 기계 상태의 실현으로 만드는 것은 입력과 출력 및 다른 기계 상태들을 실현하는 물리적 상태들에 대한 그것의 인과적 역할이다.
5. 기계 기능주의 : 그 동기와 주요 주장들
기계 기능주의자들은 마음을 일종의 튜링 기계(혹은 확률적 자동 기계)로 간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것이 심성을 갖는다는 것-즉 심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의 심적 상태들(즉 심적 상태 유형들)을 기계표의 내적 상태들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이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적절히 복잡한 튜링 기계가 된다는 것이다. 즉 한 유기체의 기계 기술인 튜링 기계가 존재하고 그것의 심적-상태 유형들이 그 튜링 기계의 내적 상태들과 동일시될 경우에만, 한 유기체는 심적 특성을 갖는다. 물론 무엇이 그 유기체의 입력과 출력들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는 결정되어야만 한다.
기계 기능주의는 도구주의의 입장을 넘어서서 심리학적 실재성을 주장한다. 여기에 두 가지 관련되는 이유들이 있다.
(1) 이미 본 대로 만일 우리가 심리학 이론이 행동에 관한 설명들(특히 인과적 설명들)을 낳기를 기대한다면, 심리 상태들, 즉 심리학이 상정하는 심리적 주체의 내적 상태들은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현장 심리학자들의 태도인 것 같다.
(2) 우리는 올바른 심리학 이론이 상정하는 심리 상태, 능력, 기능들의 기초가 되는 실제이ㅡ 생물학적 메커니즘을 발견하기를 기대한다. 사실상 우리가 심리학 이론들에 대한 생리학적 토대를 기대하고 또한 그것을 주장해야 하는 것은, 바로 심리학적 이론화에 대한 우리의 실재론적 입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 유기체에 대한 올바른 심리학은, 단지 그것에 대한 행동적으로 적합한 기술일 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기계 기술이어야 한다는 요구는 심리적 이론에 대한 실재론의 표명으로 간주될 수 있다.
기계 기능주의가 제안하는 것은 바로 다음이다. 한 유기체나 체계가 심리적 특성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이 적절한 하나의 튜링 기계를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심성을 가진 어떤 것도 하나의 적절한 기계 기술을 갖는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기계기능주의는, 그것이 적절한 종류의 기계 기술을 갖는다는 것이 그것의 심성을 구성한다는 보다 강한 주장을 한다. 다음은 심성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논제이다.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적절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심성을 가진 피조물들로 만드는 것은, 바로 우리가 튜링 기계들이란 사실이다. 기능주의는 어떤 구조적 복잡성을 지닌 두뇌를 갖는 것이 심성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그 두뇌의 중요성은 정확히 그것이 하나의 튜링 기계라는 점에 있다. 우리의 심성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 두뇌의 계산적 속성들이지, 그것의 생물학적 속성들이 아니다. 요약하면, 우리의 두뇌가 우리의 마음인 이유는, 그것이 컴퓨터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유기적인 생물학적 구조이기 때문이 아니다.
6. 기계 기능주의 : 더 고려할 점들
7. 튜링 테스트
튜링의 제안은 만일 기계들이 어떤 수준의 지적인 과제들을 인간만큼 잘 수행할 수 있다면, 그것들은 인간만큼 심리적인 존재라고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제들이란 직관적으로 지능과 심성을 요구하는 그런 것들이어야 한다. 튜링은 이러한 능력들의 존재를 테스트하기 위하여, “모방 게임”이라는 하나의 게임을 고안한다.
모방 게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이 게임의 참여자는 질문자, 남자, 여자의 세 명이다. 질문자는 다른 두 명과 다른 방에 격리되어 있다. 남자와 여자는 질문자에게 “X"와 "Y"로만 알려져 있다. 질문자의 목표는 컴퓨터 터미널을 통하여 질문들을 함으로써 누가 여자이고 누가 남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남자의 목표는 질문자가 잘못 확인하도록 오도하는 것이고, 반면 여자의 역할을 질문자를 돕는 것이다. 물을 수 있는 질문들의 주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다. 튜링의 제안대로, 이제 우리는 그 남자를 컴퓨터 기계로 대치한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질문자의 목표는 어느 것이 인간이고 어느 것이 기계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 그계는 질문자로 하여금 그 기계가 인간이라고 생각하게끔 그를 속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 기계는 첫 번째 게임에서 남자만큼 질문자를 잘 속일 수 있을까? 튜링의 제안은, 만일 그 기계가 남자만큼 그 일을 잘한다면, 우리가 정상적으로 한 인간에게 부여하는 모든 지능을 그것에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는 지능과 심성에 관한 문제들을 기계의 외모, 그것의 구성과 구조에 대한 세부 사항들, 그것이 인간처럼 말하고 움직이는지 등에 대한 문제들로부터 분리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그 테스트는 광범위한 영역의 합리적, 지적 능력들과 기능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 테스트는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가?
어떤 이는 이 테스트가 너무 강한 동시에 협소하다고 지적하였다. 즉 어떤 것이 심성이나 지능을 갖기 위하여, 인간보다 더 영리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지나치게 강하다. 또한 그 테스트는 기껏해야 인간적인 심성의 현상, 즉 인간을 특징짓는 종류의 지능을 시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너무 협소한 것 같다. 튜링 테스트에는 실패하는 지능적인 피조물이나 기계들이 왜 있을 수 없는가?
그러나 비록 방금 지적된 이유들 때문에 튜링 테스트가 심성의 필요조건으로 간주될 수는 없을지라도, 튜링 자신이 말했듯이, 적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심성의 충분조건을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어떤 것이 그 테스트를 통과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우리들만큼 영리하며, 그리고 우리는 지능과 심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도 동일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만이 공평하다. 이런 추론은 다음의 논제를 전제하는 것 같다.
[튜링의 논제] 만일 두 체계들이 입-출력에서 동일하다면, 그것들은 동일한 심리적 지위를 갖는다. 특히, 그중 하나가 심적 존재일 경우에만 다른 하나도 심적이다.
튜링의 논제가 함축하는 일반적인 철학적 입장은 기계-기능주의보다는 행동주의에 더 가깝다. 왜냐하면 기계 기능주의는 튜링의 논제를 부정하는 것과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기계 기능주의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단지 동일한 튜링 기계를 실현하는 체계들은 동일한 정도의 심성을 유지한다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튜링의 논제는 잘못된 것 같다. 즉 내적 과정의 역할은 심성에 어떤 차이를 만들어야 한다. 어떤 체계가 심성을 갖는지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서 입력-출력 상관 관계들만이 아니라 내적 과정의 구조도 고려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옳다면, 튜링 테스트와 같이 순수하게 행동주의적인 테스트는 심성의 기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8. “중국어 방” 논증
서얼은, 그것이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어떤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 기계는 심성과 동등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논쟁적인 한 사고 실험을 구성하였다.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일련의 기호들을 그와 다른 기호들로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규칙들의 집합을 가지고 있는 어떤 방(“중국어 방”)에 갇혀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 일련의 기호들은 사실은 중국어 표현들이고, 변형 규칙들은 그 적용이 그것들의 의미가 아니라 오직 관련된 기호들의 형태들에만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순수하게 형식적이다. 서얼은 그에게 주어진 규치들에 따라, 일련의 중국어 문자들을 받을 때마다 신속히 작업을 하고 그 즉시 적절한 일련의 중국어 문자들을 내보낼 수 있을 정도로, 중국어 표현들을 조작하는데 매우 숙련되어 있다. 그 방 밖에 있는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그 입력-출력 관계들은 마치 서얼 대신에 진정으로 중국어를 이해하는 사람이 그 방 안에 갇혀 있는 경우의 그것과 정확히 동일하다. 그러나 서얼은 전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며, 중국어 방 안 어디에도 중국어 이해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 방 안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오직 “통사론”에 기초해서 기호들을 조작하는 일뿐이다. 그러나 진정한 이해란 “의미론”을 아는 것을 포함한다.
서얼의 또 다른 전제는, 하나의 컴퓨터 안에서 진행되는 것은 중국어 방 안에서 진행되는 것과 정확히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기호들을 그 형태에 기초하여 규칙적으로 지배하는 조작이라는 것이다. 중국어 방 안에 중국어 이해가 없듯이, 컴퓨터 안에도 중국어 이해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얼 논의의 결론은, 심성은 규칙 지배적인 기호들의 통사론적 조작 이상의 것이며, 그리하여 튜링 테스트는 심성의 테스트로서 부당하다는 것이다. 마음은 하나의 의미론적 엔지인 반면에, 컴퓨터는 단지 통사론적 엔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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